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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 표에서, 창건 당시의 서울대의 단대 구조와 과 종류는 2005년 현재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한 번의 대폭적인 변화로 성립한 차이가 아니라, 194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혹은 크게 이루어졌던, 인위적 혹은 비교적 자연적인 변화들이 쌓인 결과라는 것도 알고 있다. 변화는 시대의, 환경의, 당시 변화 주체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다. 따라서 단대/과 변천의 역사를 고찰할 때는 단순한 변천 사실 이상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무수히 있어왔던 단대/과 변천 중 당시 시대나 변화 주체를 잘 드러내는 것 또는 현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뽑아 그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시대를 따라, 변화하다 표로 눈을 돌려 문리과대에 속한 과들을 보자. 당시 문리대는 거의 현재의 인문대와 사회과학대, 자연과학대 세 개 단대 성격의 과를 포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리대의 사학과는, 1968년 「국립학교설치령」이 일부 개정되면서 국사학과/동양사학과/서양사학과로 분리된다. 이는 사학의 독자적인 성장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진다. 특히 국사학과의 독립은 1960년대의 ‘한국학 연구붐’에 상응하는 조처였다. 1961년 정권을 잡은 박정희 체제는 자신들의 결여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경제발전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국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민족주의를 동원했다. 남북한 간 정통성 경쟁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던 이 과정에서,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등 역사를 활용해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국가의 ‘노력’과 4.19혁명 이후의 국민의식 성장이 맞물린 결과, 당시 한국학에 대한 연구는 가히 붐이라고 불릴만한 활기를 띠었다. 또 살펴보자면, 당시 문리대에는 사회과학계열의 과가 사회학과, 심리학과, 정치학과 세 개만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9년 대통령령 제 1430호 「국립대학교설치령」에 의해, 지리학과와 사회사업학과(1978. 사회복지학과로 명칭 변경)가 신설되고, 정치학과가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로 분리된다. 그리고 1975년, ‘서울대 종합화 10개년 계획’에 따른 대폭적인 단대 개편이 이루어져, 상과대의 경제학부(1961. 신설)와 문리대 안의 사회계열학과들이 합쳐져 현재의 사회과학대학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신문학과(1997. 언론정보학과로 명칭 변경)는 이 때 신설된다. 개교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사회과학계열과의 발전은, 사회과학학문이 근대에 생겨난 새로운 학문으로써 근대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으로 큰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면 이제 문리대에서 눈을 돌려, 사범대 안의 한 과가 현재 생활과학대가 담보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에도 주목해보자. 가정교육과는 1968년 사범대에서 분리되어 가정관리학과, 식품영양학과, 의류학과의 3개 학과가 설치된 가정대로 독립 승격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가정의 기능이 변화해 그 중 일부가 사회로 옮겨져 산업화되는 시대적 추세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 가정학 교육의 대상, 범위, 목표 등이 바뀌게 된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대의 변화상을 살펴보자. 공대의 변천사에는 사회의 변화가 타대에서보다 더욱 뚜렷이 반영되는데, 예를 1946년 공대의 채광학과는 1955년 광산학과로 명칭이 바뀌고, 1969년에는 지하 광물자원뿐 아니라 석유 및 해양 광물자원에 대한 탐사/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된 데 따라 다시 자원공학과로 개칭된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구개편 및 확충이 가장 활발히 추진된 단과대학이 바로 공과대학이었다. 제3공화국 정부의 경제개발전략, 즉 공업화를 통한 근대화 추진계획이 공과대학의 학과개편 및 신설에 많은 영향을 줬던 것이다. 1962년 「국립학교 설치령」에 의해 공업교육학과가 신설되고, 1963년에는 응용수학/응용물리학/응용화학과가 신설된다. 1968년에는 대통령령 제 3283호로 조선항공공학과가 조선공학과와 항공공학과로 분리확충되며, 같은 해 12월에 생산기계공학과와 재료공학과가 신설된다. 1973년에는 공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연구분야가 전문화 세분화되는 추세에 따라 기계설계학과로 새로이 발족되기도 했다. 이후, 공대는 1975년 ‘서울대 종합화 10개년 계획’과 그 후의 수많은 변화들을 거치며 오늘날에 이른다. 국가를 따라, 변화하다 위의 문단에서 우리는 「」표시를 꽤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것 안에는 서울대의 과 변천을 결정지은 법령이 자리했고, 또 그 법령은 서울대가 아닌 문교부 혹은 대통령에 의해 ‘하달’된 것이라는 것을 상기해보자. 과거에 ‘국립’서울대학교에 가해진 국가의 압력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현재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거대했다. 1946년 미 군정청 학무국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고 서울대를 창건한 이래로 서울대 정책이나 방향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국가가 개입한 경우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 중 단대/과 변천 정책에 그 범주를 한정시키고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시 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현 수의과대학이 1946년에는 농과대학의 한 학부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이 ‘농과대 수의학부’는 후에 정부 정책에 의해 여러 번의 부침을 겪어야 했다. 1953년 대통령령 제 780호 「국립학교설치령」에 의해 수의과대학으로 승격 개편 된다. 그러나 1961년 정부의 고등교육기구 간소화 방침이 담긴 「학교정비기준법」에는 다시 농과대학 수의학과로 개편하고 수원으로 이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 후 수의학에 관한 학문분야가 점차 넓어지고 사회의 요청도 증대되어, 1974년 1월 수의과대학으로 재발족한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학교정비기준법」은 1961년 당시 사범대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는데, 사범대에 관련한 그 법안의 내용은 사범대의 12개 학과를 폐지하고 과학과와 사회생활과를 신설한다는 것이었다.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여 그 때까지의 사범대 역할을 맡기고, 문리과대에 없는 가정/체육/생물/사회생활학과만을 사범대에 남긴다는 이 계획의 터무니는, 당시 사범대학 무용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사회 분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범대학 무용론은 교육 개념을 ‘교육 내용‘과 ‘교육 방법’으로 분리해 파악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즉 교과교육이란 기초 학문 분야의 지식을 교육학에서 제공하는 교수 방법에 따라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롯된다. 정부의 이 계획은 오래 가지 못했다. 62년 당시 사범대학 부설로 발족된 교육대학원은 큰 호응을 얻지 못해 62년도에 21명 합격자를 내고 63년 폐지됐고, 1962년 「국립학교 설치령 중 개정의 건」에 의해 상당수 학과들이 개칭/신설된 것을 기점으로 사범대의 폐지되었던 각과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행정당국이 학문과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는 1969년 12월로 거슬러가 찾아볼 수 있다. 1969년 12월 「국립학교 설치령」이 개정되어 문리과대학이 종교학과와 미학과가 철학과로 통합되었는데, 이는 학문의 성장보다는 행정적 편의를 의식한 결정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무런 사전협의 없던 문교부의 일방적인 이 방침에 대해 해당학과의 교수와 학생들은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3과 학생의 ‘공동선언문’이 발표됐고 문리과대학 교수들의 재고 요청이 잇달았으며, 급기야 총장실 점거와 수업 거부라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다. 결국 이 사태는 철학과내에 철학, 종교학, 미학 등의 3개 전공을 두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변화는 현재진행형지금의 서울대학교는 1946년 설립의 때로부터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 이루어져온 것이라고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끝난 것이 아니며, 서울대는 현 상태에서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학교의 변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변화를 좌우하는 것은 시대와 환경, 그리고 변화의 주체다. 현재 서울대는 학부대학-전문대학원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현재 현실상의 여러 가지 이유로 비판의 목소리도 많은 이 정책도 찬반양론의 뜨거운 논박 속에서 또 변화하여 어떤 식으로든 서울대를 다듬는 하나의 정이 될 것이다. 서울대를 두드리고 깎는 정을 직접 움직이는 역할은 그 안에 있는 구성원이 맡는다. 대학원생이든, 교수든, 총장이든, 갓 입학한 새내기든 일단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 타 구성원들과의 협의 하에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만들어나가는 변화는 그리하여 공동체가 되며, 그것은 비단 공동체만의 것이 아닌 역사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