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아래, 빨간 원피스를 입고 밤거리를 활보하는 신나는 상상!

photo1함께 활동을 하는 저널의 한 친구가 나에게, 달빛시위라는 집회가 있다며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했을 때, 솔직히 사실은 떨떠름했다.집회나 시위에 자주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새내기 시절 참여했던 집회의 경험만으로도, 집회라는 것은 나에게-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차치하고 -충분히 식상하고 진부한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photo1함께 활동을 하는 저널의 한 친구가 나에게, 달빛시위라는 집회가 있다며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했을 때, 솔직히 사실은 떨떠름했다. 집회나 시위에 자주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새내기 시절 참여했던 집회의 경험만으로도, 집회라는 것은 나에게-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차치하고 -충분히 식상하고 진부한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달빛시위에 관심이 끌려, 직접 언니네 사이트(www.unninet.co.kr)에 들어가서 이번 시위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는 수고를 자처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시위의 모토였다. ‘달빛아래, 여성들이 밤길을 되찾는다.’ 이 말 한마디가 내 구미를 당긴 것이다. 밤에 대한 내 집착의 근원 : 변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게 하는 그 무더운 여름 날. 괜히 밖에 나가서 땀 빼지 않고 방안에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뒹굴 거리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물리칠 만큼,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놈의 밤 그리고 밤길에 이토록 집착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나 스스로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딸딸이 아저씨를 기억하는가. 여학교 부근, 심지어는 남녀공학에까지 멀쩡한 옷차림으로 출현하여 이상한 손놀림을 하는 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딸딸이 아저씨인 것이다. 이들의 작태 또한 다양한데, 대범한 ‘그’들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에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단순히(?) 노출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지막한 건물 위에 올라가 누군가를 호명하며 자신의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자랑하려 하거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번째 케이스가 바로 내가 본 바로 첫 페니스에 대한 기억이다. 그는 우리 중학교에 자주 출몰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비가 오던 그 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하는 길목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바로 그 길에, 왼손에는 우산을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발기되지도 않은 힘 빠진 자신의 그것을 쥐고 그는 정말로 불쌍하고 역겹게 딸을 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게 무얼 하는 건지 몰랐다(정말이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게 바로 말로만 듣던 노출증 변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어떤 남자를 보든지 간에, 바로 그 변태와 그의 역겨운 그것을 떠올리게 되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 날 이후로, 내 생활수칙에 한 가지 추가된 것이 바로, 또다시 ‘그’를 만난다면,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신고하리라는 것이었다.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이 세금까지 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그것이 몇 시가 되었건 합법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시민의 권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난 무수한 변태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 한번도’ 신고를 하지 못했다. 신고는커녕, 나는 한껏 졸아서 앞만 보고 도망갔다. 아니, 공포를 느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 때, 나의 왼 쪽 가슴 아래서 세차게 운동하던 나의 심장박동 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경험이 새벽녘이든 한밤중이든, 해가 떠 있지 않은 때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즉 ‘밤’에 대한 나의 집착이라는 산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덧붙여,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러한 내 경험은 단순히 억울한 일을 넘어서서 참 신기한 일이다. 남성들에게 여성의 벗은 몸은 욕망의 배출구가 되는 반면, 여성들에게 남성의 그것은 공포로서 다가오는 것. 이 얼마나 신기한가. 시위 장소로 향하는 길photo2이러한 명백한 동기로 인해 참여하게 된 달빛시위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언니네와 서울여성의 전화, 그리고 관악여모를 비롯한 서울에 소재한 몇몇 대학의 여학생회로 이루어져 있는 달빛시위공동준비위원회가 주최한 시위였다. 나는 이번 행사의 주최 측이기도 한 관악여모와 우리 학교 학생회관에서 만나 시위장소인 인사동으로 향했다. 여기에 나와 함께 하기로 한 문지현 편집장도 동행하였다. 그 날, 8.15관련 소위 통일행사 덕분에 막히는 버스를 타고 인사동의 남인사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번 시위는 독특하게도 시위참가자에게 하얀색 옷과 손전등을 준비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두운 밤에 하는 시위인 만큼 행인들에게 시각적으로 어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하얀색 옷을 입고 오기는 하였지만, 분장을 하기로 했다. 원래는 각 단위의 주체들만 하게끔 되어 있는 건데,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여하튼 너무 하고 싶어 했더니 분장을 해도 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집착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인사동 전통거리에서, 귀신분장 하기 photo3우리의 분장 컨셉은 바로 ‘귀신’이었다. 얼굴 가득히 하얀색 파우더를 마구 펴 바르고, 입술과 눈 두덩이에는 짙은 갈색의 아이쉐도우를 두껍게 덧칠한 다음, 하얀 광목천으로 치마와 저고리, 즉 소복을 만들어 몸에 두르는 것이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복장은 최근 연쇄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여성들을 추모하는 의미와 함께 섬뜩한 분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본 기자는 아무리 아이쉐도우를 덧발라도 그다지 귀신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분장 해주시는 분께서 “왜 분장을 해도 착해 보이지? 그럼 안 되는데”를 연발하시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꾸 자꾸 아이쉐도우를 덧바르셨다. 어휴, 너무 착해도 피곤한 일이다. 오후 8시, 해가 져서 이미 어둑어둑해진 그때, 우리는 분장을 하고, 광목천을 몸에 두르고, 후레시를 챙기고, 피켓을 나눠받는 등 시위 준비를 완료했다. 이 날의 피켓들에는 아주 재미있는 문구들이 많이 있었다. ‘밤은 무죄, 여성들도 무죄, 너만 유죄, 딱 걸렸어!’, ‘여자니깐 집에 일찍 들어가라고? 너나 일찍 들어가!‘, ’가해자를 집에 놔두라, 피해자를 돌아다니게 하라!‘, ’밤에 배고파도 무서워서 못 나간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등등. 이렇게 시위준비를 마친 후, 바로 성명서 낭독에 들어갔다. [2004년 8월 13일 달빛 아래, 여성들이 밤길을 되찾는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는 이번 시위의 요구사항과 목적 및 취지 등을 담고 있었다. 최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고, 이에 많은 여성들이 밤길을 다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껴야 했다. 또한 우리 여성들은 낮이나 밤이나, 가정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상적인 폭력 속에서 위협을 받아왔다. 그러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의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이 알아서 조심할 것을 요구하며, 폭력의 발생원인을 피해자 여성의 부주의와 품행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우리는, 성폭력의 본질을 호도하고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에 분노하는 것이고, 왜곡된 밤의 이미지를 부수고 새롭게 여성의 안전한 밤길을 찾고자 이 거리에 나온 것이었다. 실제로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각과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크게 왜곡되어 있다. 밤길에 배회하고 다니다가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그렇고 그런 여성’일 것이라는 시각이나 ‘그러게 여자가 무얼 하려고 밤에 돌아다녀’라는 식의 말들은 문제의 본질을 가려버리는 이 사회가 가진 편견의 극치가 아닌가.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그 폭력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기본적인 운신의 권리인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얼마나 많이 빼앗아 왔고 여성의 활동범위를 얼마나 많이 제약해 왔는가는 너무도 명확하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밤거리를 다니다가 마주치는 숱하게 많은, 그 이름 모를 노출증 환자 덕분에,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마음 졸여야 했던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뒤따라오는 남자의 구두 발자국 소리에도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시늉을 하며 집으로 총총 걸음을 해야 했던가. 달빛 아래에서의 시위 photo4이날 시위는 행사를 주최한 여성단위들 뿐만 아니라, 행사의 취지에 동감하는 시민들 역시 함께 했다. 더러는 인사동에 데이트를 하러 왔다가 여자친구와 함께 행진에 참가하겠다고 오신 남성분들도 있었고, 더러는 술을 조금 마신 걸로 추측되는 웬 중년 아저씨가 “옷차림, 술 마시는 자세 등등, 여성들이 여성의 몸가짐을 지켜야한다”며 욕설까지 난발하는 일도 있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우리는 남인사 마당에서 시작하여 인사동과 종로 거리 구석구석을 행진했다. 모둠을 짜서 조별로 행진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워낙에 많고 거기다가 확성기가 없었던 관계로, 시위 과정에서 대열이 흐트러지거나 행진 방향이 어긋나는 일도 종종 있긴 했다. 하지만 우리는 꿋꿋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걸어갔다. “여성의 밤길을 위협하는 너! 너나 일찍 들어가!” “여자들아 밤마실 가자!” “지역사회 안전보장!” “밤길! 밤길! 활보! 활보!” 거기다가 ‘무슨 일 이길래, 이 밤에, 이 여자들이 이상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지’라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는 행인들의 표정도 함께 즐기면서. 한 시간 남짓의 행진을 마친 우리는 종로빌딩 앞에서 멈춰서, 드디어 광목천을 벗어던지는 시간을 가졌다. 퍼포먼스 진행자 중 한 분이, 광목천을 던져버리는 것은 여성을 속박하는 억압을 벗어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며,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나 역시 광목천을 벗어 던졌는데, 억압도 억압이지만, 너무 더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던 터라, 진심으로 기뻤다. 이어서 우리는 벗어 던진 광목천을 이어서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갔고, 지금까지 가장 많이 답답했다고 느낀 여성분 한 분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이어진 광목천을 가위로 끊자, 사람들이 원 밖으로 나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 날은 행사의 참신함 때문인지, 각 언론사 및 방송사에서 아주 많이 취재를 와서 각종 사진촬영 플래시와 방송 조명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위험한 상상? 신나는 상상! photo5행진과 퍼포먼스를 마친 우리는, 다시 남인사 마당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의 ‘좀 많이’라는 노래와 올챙이 송을 오늘 모임의 취지에 맞게 개사한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시위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날 밤, 참여한 모든 여성들이 밤늦은 시각까지 거리 한복판에서 맘 편하고 즐겁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곁에 남자친구들이 있어야 밤거리에서 마음이 든든했던 여느 때와는 달리, 여성들이 스스로에게 주는 해방의 자유로, 신나게 즐길 수 있었던 모처럼 만의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날이 일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것은 정말로 옳은 생각이 되어 버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또다시 술에 잔뜩 취한 아저씨를 만났다. 옆에 있는 기둥을 마구 두드리며 ‘동그라미 그리다가…“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말을 걸고 또 뭘 쳐다보냐면서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저씨에게는 나름대로 삶의 애환을 표현하신 건지는 몰라도, 나는 정말 무서웠다. 방금 귀신분장을 하고 밤길 되찾기 시위를 하고 왔는데, 집에 가는 밤길도 아직 되찾지 못할 줄이야. 역시나, 여성과 남성, 이 모두가 안전하게 밤길을 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기 위해서는, 여남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일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매일 같이 꿈을 꾼다. 그 누구의 위협의 공포도 없이, 에서처럼 비 오는 목요일 빨간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상상을 하지 않고,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새빨간 매니큐어와 립스틱을 바르고 그리고 새빨간 구두를 신고 밤거리를 활보하는 꿈을 매일같이 꾼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것은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아니라 ‘신나는’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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