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은…국제 평화를 진실로 희구하며….육해공군과 기타의 전력은 일체 보유하지 않는다. ” 1946년 제정된 일본의 전후 헌법 9조에 따르면 현재 일본은 군대를 보유해서도 안 되고 보유하더라도 그 역할은 자위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이즈미 총리의 집단자위권 (집단자위권이란 한 나라가 직접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동맹국이나 우호국이 무력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실력으로 막는 권리를 말한다.) 주장은 평화주의 헌법과 현재 일본의 현실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셈이다.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이미 일본이 주변국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역할이 자위에 국한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헌법 9조가 무색한 일본의 재무장 헌법상의 명백한 금지규정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자신을 냉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하는 미국의 지원 아래 자위대를 지속적으로 증강시켜왔다. 1987년에 GNP 1% 억제선을 넘긴 막대한 방위비를 토대로 90년대 자위대는 세계 최강 병력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유엔 협력이라는 미명하에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정당화되고, 78년 미일 방위가이드라인과 99년 신가이드라인 (97년 미·일 신가이드라인은 미·일 군사협력의 틀을 일본 바깥까지 확대하여 극동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이드라인 관련법안 중 핵심인 주변사태법안은 ‘주변 사태’가 발생해 미군이 출동할 경우 일본 자위대가 미군에 대한 ‘후방지역지원’, 즉 물품과 용역의 제공을 맡는다는 것이 골자이다.)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로 일본군의 주변국 진출 가능성은 더욱 확대되었다. 전후 헌법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는 집단자위권마저 인정되고 나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진출을 우려하는 것도 기우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도 핵무장을 하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 국회에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본 방위청 정무차관 니시무라 신고(西村眞悟, 자유당)의 발언(연합뉴스, 99. 10. 19)이나 MD 체제와 맞물려 들어가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요구를 살펴보면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아시아인의 우려는 더욱 깊어 질 수밖에 없다. 당장 요 며칠간의 신문만 뒤적거려도 무기사용 완화 추진(2001.8.1), 일 해상자위대 TMD 배치 예정(2001.8.17), 게릴라 부대 창설 예정 (2001.8.31) 등 자위대가 하루가 다르게 전투력이 강화되고 헌법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사회를 휩쓸고 있는 우향우…! “천황의 세상이 천년 만년 영원히 계속되어..” 메이지 시대 천황주의와 군국주의의 확산을 위해 국민들에게 보급했던 노래 기미가요의 한 구절이다. 1999년 오부치 정권은 천황의 영속을 기리는 기미가요를 국가(國歌)로 법제화했다. 국가를 법으로 제정하는 것도 세계적으로 드문 일 중의 하나이지만 전쟁의 궁극적인 책임자인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문부성의 지시 아래 일본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교과서에도 우경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2000년에는 패전 후 처음으로 천황의 사진이 교과서에 등장하였다. 급기야 2001년 4월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문부성의 검증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2001년 8월 13일 고이즈미 총리는 도조 히데키 등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28명을 비롯해 246만명의 전몰자 위패가 안치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하였다. 일본의 총리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형성장소이자 메이지 정부의 대외적인 팽창정책에 따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장소의 역할을 맡아왔던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일본 국민의 65%가 찬성하였다(2001.8.21 한겨레). 종국적 목표 : 개헌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흐름이 누구 하나의 광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 집행위원장 김민철 씨는 교과서 문제를 비롯한 일련의 우경화 흐름이 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어온 우경화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미-일 신가이드라인 체결,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국가)법 제정, 자위대의 해외파병 등이 1단계 국면이라고 한다면 2단계 국면이 교과서, 그 다음 단계가 평화헌법 개정이라는 것이다. 일한민중연대 전국네트워크 (는 약 70년대부터 재일한국인 정치범의 구명운동, 한국의 반독재민주화투쟁과 평화통일운동, 민주노동운동과의 연대를 추구해온 일본 각지의 시민운동 단체 및 개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공동대표 渡健樹씨도 고이즈미 정권의 최종 목표는 개헌에 있다고 말한다. 헌법 9조의 개헌을 통해 이전까지 전쟁 불가의 국가였던 일본이 전쟁이 가능한 ‘보통 국가’로 변하려 한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는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현재만큼 개헌 분위기가 고무된 적은 없었다. 아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정권 탄생의 아버지로 공언하고 있는 나카소네 스히로 전수상은 공식적인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시도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고이즈미 총리라 추진하고 있는 총재공선제는 물론 야스쿠니 참배, 헌법 개정 등은 이전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수상의 지론이 었고다.) 등 정통 국가주의자들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개헌을 공언하고 있고 최대 야당에서도 이에 대해 별다른 반발이 없는 상태이다. 전체의 80%가 고이즈미 총리를 지지하는 일본 국민들도 이전과 달리 개헌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 여기에 개헌에 대한 미국의 지원도 있어 개헌의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 이후 지속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확대시키고자 노력해왔고 (월간 사회진보연대 16호 임필수) 이에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일본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 집단적 자위권이 불가피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일본에서는 이미 작년 초 일본의 중, 참의원에는 헌법조사회가 설치돼 5년 시한으로 개헌검토 작업에 들어간 상황이다. 자위대 증강과 해외파병. 미일 신가이드라인. 신사참배. 집단 자위권과 헌법 개정.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민족문제 연구소 조직부장 방학진 씨는 ‘우리 자신의 비겁에 분노하라.’고 말한다(2001.8. 말 지). 손가락을 잘라 보내고 여야 남북 할 것 없이 격렬한 성토를 해대고 나서는 언제 있었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는 그 ‘민족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분노하라는 것이다. 민간·자체 단체의 교류를 일방적으로 끊음으로서 서로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좁디좁은 민족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연대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나는 항상 그 답을 찾고 있다” -재일 코리안이 말하는 일본 국민과 우경화 재일한국청년연합 도쿄지부 부위원장 금령하 기고자 소개: 1992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졸업한 금령하씨는 1994년 한청련 도쿄 결성시의 창립멤버로 현재 한청련 도쿄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청련은 주로 재일코리안 3세세대들이 모여서 재일 코리안들의 역사나 법적지위,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학습하고 일본친구들이 재일 코리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위해 일본청년들의 NGO에서 강습회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재일 동포 단체다. 2001년8월13일 오후 4시각 방송국 TV프로그램이 중단되며 긴급보도가 시작되었다. 고이즈미 수상이 야수끄니 신사를 참배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15일을 피함으로서 정치적 타협과 아시아 각국의 감정을 고려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겠지만 어쨌든 수상은 참배했다. 일장기를 흔들어 고이즈미 수상을 맞이하는 수백명의 열광적인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내 우울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까닭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점점 커진다 전후 보상 문제를 결코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일본. 아시아 침략의 사실을 언제까지나 아시아대동아공영권을 만들기 위한 성스러운 행위였다고 미화하고 싶어 하는 일본. 아시아의 2,000만 희생자보다 자국의 300만 `영령’의 죽음이 더 중요하다고 의심조차 안하는 일본. 한반도 침략으로 인해 자국 내에 안게 된 우리 재일 코리안들을 항상 차별과 치안관리 대상으로 취급해온 일본. 그들은 왜 그럴까. 멸망하지 않는 일본 군국주의 흐름에 화를 내고 외치고 싶은 마음보다 오히려 그 까닭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는 더 커지기만 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일본 일본은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흔히 일본은 근대화했다고 하지만 중앙집권정부를 가지고 군대를 가지고 농촌공동체가 국가라는 큰 틀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근대화인가? 일본은 외형만 근대화되었을 뿐 근대적인 자아나 시민적 이념이 사람들 속에서 자라지는 않았다. 그 당시 일본인에게는 국가와 개인의 명백한 경계선이 없었다. 히틀러의 만행이 단죄되었을 때 서독일 시민들은 그 자신의 주체적인 내성으로 전쟁책임자와 그에 동조한 시민들을 질타하였다. 일본에는 그런 내성이 없다. 누가 전쟁 수행 책임자인지, 그 책임자를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단지 자기는 봉건 농주의 명령에 따르듯이 전쟁으로 나갔을 뿐이다. 근대적 자아도 시민적 책임도 없는 사회에서 진행된 일들에 아무도 책임 질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 것이다. 그 때 대일본제국만세를 부르면서 천황만세를 부르면서 열광적으로 일장기를 흔들었던 사람들도 역시 수없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 사람들이 무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세를 부르면서 열광적으로 거리로 나간 사람들이 그 결과로 인해 아시아에서 2,000만의 희생자를, 자국내 300만 희생자를 발생시킨 데에 대해 자기 책임을 외면할 수 있을까?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 또한 섬나라 일본는 주변국을 항상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었다. 적어도 그런 착각이 허용되는 토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논리는 항상 자국내서 완결할 수 있다. 자기들의 논리가 결코 외부에는 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 수 있다. 게다가 전후 일본의 침략전쟁책임을 엄하게 따진 아시아의 피해 당사국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은 계속 ‘외부’ 없이, ‘주변국’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90년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타난 위안부문제를 비롯한 전후 보상 문제 청산요구를 ‘갑자기 외부한테서 맞았다’ 고 밖에 인식 못하는 것 같다. 적어도 일본이 그렇게 착각할 수 있는 상황이 유감에도 50년 동안 유지 되 온 사실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전후 서독일과 비교할 때 전쟁책임의 반성이란 점에서 큰 격차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내셔널리즘. 그 위험한 함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변하려고 하지 않은 이곳에 살면서 저는 항상 왜 그럴 수 있는지 그 답을 찾고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일본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으로 되는 것 같아서 너무 두렵다. 차라리 내 자신이 내셔널리즘에 빠져 고민을 그만 두는 게 훨씬 간단하고 편하긴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일인지 나 또한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의 흐름을 단절하려는 시도에 대한 체념과 포기를 의미할 뿐이다. 나는 시민혁명을 이뤄낸 한국 시민사회를 믿는다 사실 지금 일본은 국가주의로 나가고 있다. 한국도 민족주의 우익들이 대두하고 있다. 위험한 흐름은 일본을 단초로 하면서 상승 효과를 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시민혁명을 이뤄낸 한국 시민사회를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동세대의 한국청년들의 지혜와 깊은 통찰력을 믿는다. 그들이 항상 내 옆에 있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일본친구들 또한 항상 제 옆에 한국청년 옆에 함께 함을 확신하고 있다. 사회가 어떻든 상관없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항상 사랑하는 친구들 옆에 서있을 것이다. 이 국가주의의 흐름을 단절할 수 있는 것은 한국과 재일, 그리고 일본 청년세대들의 연결이라고, 서로를 알려는 의지와 대화라고 생각한다. 함께 웃고 노래하고 수다 떠는… -일본 대학생이 말하는 일본 역사 왜곡과 한일 교류 Fumi Kumagai *후미 씨는 21살의 일본학생으로 현재 Meiji Gakuin 대학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다. 중 고급학교 시절 학교에서 재일 코리안 친구를 만나면서 일본 사회내에서의 재일 코리안에 대한 차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진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일본 청년 중 하나이다. Fuso-sha에 의해 발간된 새 역사교과서로 인해 오늘날 한일관계는 약간 긴장되어 있다. 나는 실제로 새 교과서를 읽어 보았고 거기에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잘못 기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과서 문제가 나타나게 된 주요한 원인은 일본이 지난 시기 아시아 국가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일본이 사과나 배상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메이저 그룹이 아니다. 이는 전후 일본 사회에 풀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시아 국가들과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기 위하여 일본은 침략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해서 우리의 애국심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역사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결정적인 기초가 된다. 우리는 과거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었다. 그러나 올 여름 오사카에서 열린 한일 유스 포럼에 참가하면서 나는 한국인들이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 개개인을 명확히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일본 국민 개개인과 정부를 혼동하지만 개개인은 하나의 국가에 속하는 것이지 그들의 정부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은 다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수용하기 위해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유스 포럼과 같이 한, 일 그리고 재일 코리안 청년들이 만나는 자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역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있어야 한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려면 정보나 지식뿐만 아니라 함께 웃고 수다 떨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이 지금부터는 언제나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