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은 있으나 나라는 없다. 고유의 말과 글이 있으나 쓸 수 없다. 2등 국민으로 가난과 억압 속에 살아야 한다. ‘중동의 화약고’, ‘중동의 집시’, ‘세계 최대의 소수민족’…. 오늘도 처절한 수식어를 달고 분쟁 기사에 오르내리는 쿠르드족. 지난달 터키 군이 이라크 국경을 넘어 쿠르드족 반군(PKK : 쿠르드 노동자당)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쿠르드는 다시 분쟁의 중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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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드 족 반군에 대한 터키 군의 소탕작전을 승인한 터키 의회에 항의하는 쿠르드 인. 그의 손에는 쿠르드기(旗)가 들려 있다. |
쿠르드의 독립을 위해 저항하는 PKK를 소탕하기 위해 터키 군부는 지난 10월 15일 ‘앞으로 1년간 터키 군이 횟수 제한 없이 이라크 북부를 공격할 수 있는’ 침공 동의안을 승인했고, 터키-이라크 국경지대에만 10만 병력이 배치됐다.? PKK는 “터키가 공격을 중단하고 이라크 침공 계획을 포기하면 휴전을 제의하겠다”고 했지만, 터키 정부가 휴전제의를 거부하면서 사태는 점차 악화되고 있다. 쿠르드 사람들은 오늘도 불안의 공포 속에 숨죽여 살아가고 있다. 나라 없이 떠도는 ‘중동의 눈물’ 쿠르드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8천년 역사의 땅 쿠르디스탄!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4천 5백만 쿠르드 민족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지역이 터키·이라크·이란·시리아로 쪼개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나라 없이 살고 있다. ‘쿠르드인의 땅’이라는 뜻의 ‘쿠르디스탄’ 지역은 중동 최대의 수자원과 석유자원을 간직한 땅이자 이라크에서 터키에 이르는 송유관이 지나는 곳으로, 자원을 노린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쿠르드 민족의 독립은 더욱 멀기만 하다. 언제나 힘없는 나라나 소수민족에게 풍부한 자원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이다. 쿠르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터키에서는(쿠르드인의 48%가 터키에 살고 있으며, 이는 터키 인구의 20% 를 넘는다) 쿠르드족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끊이지 않는다. 1922년부터 터키정부군은 4천여 개의 쿠르드 전통마을을 불태웠고, 3백만 쿠르드인들은 삶터에서 강제 추방돼 낯선 겨울 땅에 내던져졌다. 터키는 ‘독립하려 하지 말고 터키 국민이 되라, 그러면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 정체성’을 버리고 ‘개인’으로 흩어진 사람에게는 쿠르드인이기에 받아온 억압 대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쿠르드 사람들이 터키의 ‘편한 노예’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PKK, 쿠르드족의 자유와 독립의 대변인? 서구 유럽과 미국, 터키가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PKK는 쿠르드의 독립을 위해 저항하는 단체이다. 일제시대 우리가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1978년 PKK를 결성하여 1984년부터 무장 항쟁을 지휘한 압둘라 오잘란(Abdullah Ocalan)은 전 세계에 알려진 인물이다.?쿠르드인들에게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자 희망을 주는 지도자이지만, 터키에서는 그의 사진만 가지고 있어도 총살형이다. 하지만 1999년 종신형으로 수감된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터키 쿠르드 난민 아이들은 외국인만 보면 우르르 집으로 달려가 몰래 감춰둔 그의 사진을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승리의 V자를 힘차게 들어 보이며 외친다. “압둘라 오잘란, 외~줄굴리크! (압둘라 오잘란, 승리하라!)”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PKK는 쿠르드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자유와 독립의 대변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도 부모들은 쿠르드족의 자유와 평등, 독립을 위해 PKK가 되겠다며 떠나는 딸과 아들들의 뒷모습을 눈물로 삼켜 보낸다. 쿠르드족에 대한 미국의 이중 잣대미국과 서구는 터키 정부에 자제를 요청하면서 사태 해결에 힘쓰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쿠르드 민족을 억압하는 데 동조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쿠르드 반군을 이라크 북부에서 몰아내는데 미국 정부가 협력하겠다”고 터키 정부에 약속했고, 영국 외무장관과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터키와 이라크 간의 협력이 쿠르드 반군의 위협을 제거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라크로 가는 미국 군수물자의 75%가 터키를 통해서 가고 있고, 이라크 문제가 더 복잡해지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쿠르드 민족의 자유와 목숨을 건 저항을 이용하고 있다. 동맹국인 터키와 싸우고 있는 PKK는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만, 견제 대상인 이란과 싸우고 있는 PKK에는 지원을 하며 이란과 대리전을 치르게 하고 있다. 총성 울리는 겨울, 평화의 봄을 꿈꾼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이중 잣대에 휘둘리고, 석유자원을 노린 강대국의 억압을 받으며, 세계의 묵인 아래 고립된 쿠르드 사람들에게 다시 차갑고 무서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자신들의 말도 글도 쓰지 못하고, 정체성도 밝히지 못하는 쿠르드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어린 시위대가 되어 중무장한 터키 군경의 기관총 앞으로 나선다. “나는 소매치기가 되기 싫어요. 우리나라 말로 공부하고 싶어요.” 어머니들은 눈물로 말한다. “터키어를 쓸 수 없기에 일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마저 터키어를 쓰면 우리 아이들은 영영 쿠르드 말과 문화를 잊고 맙니다.” 쿠르드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치고 있는 이는 다짐한다. “제 앞에는 3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승리하거나, 구속되거나, 암살당하거나. 어느 길이 나올지라도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웃으며 걸어갈 것입니다.” 일제 치하 같은 고통을 경험한 우리마저 더 높은 나라, 부자 나라를 꿈꾸며 외면하는 사이, 총성과 울부짖음으로 우리의 지난 과거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쿠르드는 우리의 과거가 아니다. 가난하고 고통에 울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 미래의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에 따라 우리 미래가 결정될 것이라 믿는다. 오늘도 독립을 꿈꾸며 눈 덮인 산에서 낡은 총 한 자루 들고 이름 없이 죽어가는 쿠르드 젊은이들을 잠시라도 젖은 눈으로 떠올리고 지켜봐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