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은 [평화]다 68세대들은 1959년 쿠바혁명과 1960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쟁 과정에서 제3세계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보고 큰 영감을 얻었다. 특히 쿠바혁명의 주역 체 게바라는 학생들에게 혁명의 우상이자 반제국주의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제국주의에 맞선 평화 수호’는 68혁명의 중요한 화두가 됐고, 68세대는 미국의 베트남 공세를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맞서 싸웠다. 68혁명은 [반(反)권위]다권위주의 타도는 68혁명의 중요한 슬로건이었다. 권위주의, 혹은 권위적인 국가에 대한 비판은 제2차 세계대전과 유태인 대량살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독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었던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은 68세대들의 반권위주의적 성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시위대는 구좌파와도 결별했다. 68혁명은 [젊음]이다 혁명의 주역인 대학생들은 젊음을 무기로 자신들의 삶 가까이에 있는 부조리부터 철폐하고자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공간인 대학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교양에 기반을 둔 선발고사의 폐지’도 시위 구호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장치가 노동자계층 출신 학생들의 대학 입학을 막음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안으로는 만인에게 개방되는 ‘장벽 없는 대학’의 건설이 제시됐다. 68혁명은 [인본주의]다 68세대에게는 물질주의적인 소비사회도 전복 대상이었다. 이들은 소비사회가 일상적 소외를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했다. 수동적 소비와 진부한 일상에 반기를 들었으며, 록 음악과 대마초, 거친 몸짓 등으로 이러한 거부의 코드를 표출했다.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한 기술 진보가 인간성 말살로 이어지는 과정을 목격한 것도 68세대들이 이러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경제적 가치가 아닌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사회를 꿈꿨다. 68혁명은 [성의 해방]이다‘성의 해방’은 68운동을 움직여 갔던 큰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시위대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진지한 내용을 강연하는 교수들 앞에서 상반신을 벗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침투해 강연을 방해하기도 했다. 성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보수적 가치관을 희롱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주거공동체 ‘코뮌’은 성의 자유를 확산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여자랑 두 번 자는 사람은 이미 기성세대다”라는 슬로건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피임약의 보급과 낙태의 확산은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했다. 68혁명은 [생태주의]다 68혁명이 가져다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는 녹색당의 출현이다. 68혁명을 거치며 형성된 신좌파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일부는 지역운동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들은 원자력발전소 건립이나 공해문제와 맞닥뜨리게 됐고, 이러한 시대적 토양 속에서 각국에서 녹색당이 탄생했다. 독일 녹색당은 정당명부제 비례대표제를 등에 업고 80년대 초 원내 진출에 성공했고, ‘연대의식에 기초한 환경공동체 건설’이라는 대안을 제시해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조했다. 참고자료 다중지성의 정원 특집강좌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