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 여성운동은 진화한다

2007년은 관악여성주의자모임연대(관악여모, 설립 당시는 ‘관악여성모임연대’)가 만들어진지 10년째 되는 해다.서울대 여성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해 온 관악여모.그 10년간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관악여모의 설립 배경부터 현재까지, 서울대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짚어본다.신정휴 사건, 학내 성폭력의 베일을 벗기다 서울대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주의가 확장되기 시작한 시점은 1993년.

2007년은 관악여성주의자모임연대(관악여모, 설립 당시는 ‘관악여성모임연대’)가 만들어진지 10년째 되는 해다. 서울대 여성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해 온 관악여모. 그 10년간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관악여모의 설립 배경부터 현재까지, 서울대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짚어본다.신정휴 사건, 학내 성폭력의 베일을 벗기다 서울대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주의가 확장되기 시작한 시점은 1993년. 당시 학내외를 뜨겁게 달궜던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신교수 사건)이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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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수 사건 당시 붙여진 자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당시 화학과 유급조교였던 우 모 씨는 신 교수로부터 성적 괴롭힘을 당했고, 이를 거부하자 유급조교 재임용에서 탈락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93년 9월 학생들 사이에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자보 논쟁이 벌어졌다. 다음해 5월, 1심에서 우 조교는 승소했고, 이를 기점으로 총학생회 측에서는 ‘화학과 조교 성희롱사건 대책위’를 꾸려 신정휴 교수 퇴진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항소심 재판은 계속 됐다. 이듬해인 95년 7월 25일 선고공판에서 고등법원은 우 조교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학내는 들끓기 시작했고, ‘남성위주 판결’, ‘가해자 중심의 판결’이라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대책 마련에 나선 총학 공동대책위는 설문조사, 재판부에 엽서 보내기, 총장 면담 등의 활동을 계획하고, 본부 측에 성폭력 학칙 제정과 신 교수 징계 회부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96년에 신 교수는 교양과목을 맡아 다시 강단에 설 기회를 얻게 됐다. 하지만 2학기 학부 강의를 맡은 신 교수는 학생들의 수강신청 집단 거부라는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신 교수는 강의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신교수 사건은 98년 2월 10일 대법원이 신 교수의 성희롱을 인정하고 사실상 원고의 손을 들어주면서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에 더해 8월에는 우 조교가 총학생회에 사건 내용을 알리고, 자보를 붙여 자신의 입장을 학내에 표명했다. 이에 따라 총학생회, 대학원 자치회, 여성문제 동아리 연합회의 세 단체가 대책위를 구성하고 8월에서 11월에 걸쳐 진상규명 활동을 진행해 나갔다. 신교수 사건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법적 공방과 학내 논란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여러 여성모임들이 만들어지고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간 것은 여성운동의 활성화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또 학내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나면서 반(反)성폭력 담론의 장을 본격적으로 마련하였다.1997년, 관악여성모임연대가 발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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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열린 페미니즘 문화제에서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 한 학생

신 교수 사건을 계기로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고, 학교 안팎에서 여성문제에 뒷짐만 지고 있던 서울대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97년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학내 여성주의가 큰 도전과 성장의 기회를 맞이한 해였다. 4월에는 약대 구 모 교수의 제자 성추행 사건, 고속버스에서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대자보가 학내에 붙는 등의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이 과정에서 학내에서는 가해자의 실명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사건 처리 방식을 놓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한편 같은 해 5월,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해 학내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줬다. 이 같은 여러 사건들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관악여성모임연대(관악여모)가 그 첫 걸음을 내딛었다. 관악여모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학내 여성 모임들이 연대해 만든 조직이다. 신교수 사건이 공론화되고, 96년에는 전투경찰이 연세대 한총련 집회에 참여한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학내 각 여성 모임들이 결집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97년에는 관악여모가 출범했다. 관악여모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총학생회 선거에서 여성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이다. 관악여모는 당시 출마한 선본들에게 성폭력 관련 학칙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제안하는 등 반성폭력 학칙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후로도 정책간담회 등에 패널로 참가해 선본들의 여성주의적 인식 제고를 촉구했다. 많은 논쟁 속에서도 관악여모는 한 단계씩 활동의 지층을 쌓아나갔다. 98년 5월에 총학생회와 함께 제1회 페미니즘 문화제 ‘있다!’를 주최하고, 이듬해에는 ‘미친년 집나가다’라는 주제로 제2회 페미니즘 문화제를 연다. 관악여모의 또 다른 성공적인 활동으로는 ‘달거리 공방’이 있다. 달거리 공방은 여성의 신체에 유해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대안 생리대를 직접 만들어 보는 자리이다. 인문대의 한 여학생은 가장 기억에 남는 관악 내 여성주의 활동으로 관악여모 주최 달거리 공방을 꼽았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가장 활발하고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며, 재미있다”고 답하며 “앞으로도 달거리 공방에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를 비롯한 관악여모의 활동은 ‘여성의 방식을 실천해나가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활동과 더불어 관악 여성들의 입장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함께 아우르며 학내 여성주의의 도약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반성폭력 학칙제정, 여성운동의 가시적 성과 반(反)성폭력 학칙제정운동에 대해 김보명(여성학협동과정 석사과정) 씨는 “지금 와서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가장 기억하는 운동이자 대안여성주의운동의 흐름에서 가장 가시화 됐고 활발했던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97년 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학생의 79.1%, 여학생의 92.5%가 성폭력 관련 학칙제정이 필요하다고 답해, 반성폭력 학칙제정운동에 대해 고조된 관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성폭력 학칙제정운동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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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19 대행진. 반성폭력 학칙 제정을 요구하는 부스에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98년 3월에는 반성폭력 학칙제정을 위한 집회가 열렸고, 10월 7일에는 총학생회 성정치위원회 차원에서 학칙제정 관련 학생시안을 본부에 제출해 논의를 본격화했다. 그러나 본부는 성폭력 규정 대신 인권 규정을 제시하며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데 그쳤다. 당시 대학본부 기획부실장은 ‘상징적 의미 외에 어떤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를 넘겨 99년 4월에는 반성폭력 학칙에 대한 학생의견 수렴을 마치고 실천단의 활동이 시작됐으며, 관련 공청회와 결의 집회가 열렸다. 오랜 요구를 거쳐 마침내 2000년에 성희롱·성폭력 규정안이 마련됐다. 반성폭력 학칙 제정을 요구하는 흐름은 학술의 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98년에는 대학원에 여성학 협동과정이 신설됐고, 99년에는 여성사 강좌가 신설되어 여성주의의 학술적 장을 새로 열었다. 이밖에 학내에 성폭력 상담소가 설치되어 성폭력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열었다.농활대 철수 논란과 함께 불어 온 거센 비판 그러나 여성운동 진영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해당 사건이 성폭력에 해당하는지의 판단에서 피해자의 판단을 중심에 놓는 피해자 중심주의, 가해자의 실명 공개사과자보를 요구하는 처리 방식에 대한 반발은 계속해서 제기돼왔다. 2004년 농활 도중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서는 외부 언론의 보도까지 더해져 커다란 논쟁이 일어났다. 2004년 7월 충남 아산에서 활동중이던 사회대 농활대는 지역 농민회와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는 새벽 늦게까지 이어졌고, 중간에 몇몇 여학생들은 방에 들어가 먼저 잠을 청했다. 그 때, 사건의 가해자는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방 안에서 잠든 여학생들 사이에 누워 몸을 더듬었다. 피해 여학생들은 곧바로 이 사실을 농민회 간사에게 알렸고, 다음날 긴급히 학생회와 농민회의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이후 사회대 농활대는 전원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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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농활대철수 사건 당시 사회대 농활대가 붙인 자보

이 사건이 외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논란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기사 내용은 한 농민이 농활대 여학생을 ‘아가씨’라고 부른 것이 성폭력에 해당한다며 서울대생들이 일방적으로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농활대가 ‘아가씨’라는 호칭을 거부했던 것은 사실이나, 술자리의 성추행 사건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학내에서 여성주의 운동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가장 큰 목소리는 ‘유별난 여성주의’에 대한 비난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냥 농활일 뿐인데, ‘아가씨’라는 호칭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스럽게 구느냐’는 반응이 나왔고, 한 운동 단위는 ‘민중성이 결여된 페미니즘은 부르주아적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서울대 페미니스트 모임 ‘Imagine’은 자보를 통해 ‘여성농민들의 삶에서부터 농촌에서 자라는 아동, 청소년들의 삶에까지 반성폭력의 문제의식을 확장시켜야 한다’며 농활에서 여성주의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농활에서의 반성폭력 운동을 농활대의 여학우를 ‘위해서’ 자치규약을 제정하는 정도로만 협소화시키지 말자. 이는 반성폭력 운동을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것으로 만들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Imagine은 이 사태를 통해 ‘우리의 위치를 한걸음 더 전진시킬 수 있는 발전적이고 건강한 논쟁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감정적 성별 대립을 넘어 합리적인 논쟁을 이루는 것이, 지난 10여 년의 운동 이후 서울대에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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