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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시민들에게 북한의 집단체조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0년 가을이었다. 그 해 6월 15일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고, 그 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행사에 남한의 인사들이 평양에 초대되어 이 집단체조 공연을 관람했다. 이어 곧바로 미국 국무장관 울브라이트도 북한을 방문했을 때, 역시 이 집단체조를 보았다. 당시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과 두려움, 또는 감탄과 경악이라는 이중적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물론 남한측 인사들이 북한의 노동당 창건행사에 참관하는 것 자체가 논란거리였지만, 남북화해의 큰 물결은 이를 잠재운 대신, 오히려 이 집단체조를 통해 북한이 전달하려고 한 정치적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였고, 과연 이 집단체조가 민족문화적 자원인가, 아니면 사라져야 할 집단주의의 유물인가라는 논쟁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당시 이들이 본 집단체조는 으로 이 작품은 북한의 집단체조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1998년에 공연된 이 김일성 사후 5년간의 집단체조를 결산한 것이라면, 2000년의 은 북한정권 55주년을 기념한 것으로, 21세기의 북한 집단체조의 새로운 전개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2002년에 만들어진 은 이 때의 변화를 좀더 밀고 나간 것으로, ‘민족적’관점을 더 강화하고 ‘문화 예술적 기법’들을 더 많이 포함시켜 ‘볼 거리’로서의 성격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은 한국의 월드컵 행사에 대응하려는 기획이었다. 북한당국은 북한 인민들보다 남한이나 일본, 기타 외국인들을 평양으로 끌어들여 이를 관람하도록 홍보를 많이 했지만, 당시의 한일 월드컵 열기는 이런 북한의 홍보를 무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관광객 유치 기획상품으로서의 아리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원래 지니고 있었던 집단체조의 내용적 구성에서의 긴장도 약간은 무뎌지고 있었다. 그 후 긴박하게 돌아간 북핵위기 국면에서 집단체조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북핵문제가 어느 정도 타결을 향한 가닥이 잡힌 올 가을에 북한은 다시 아리랑 공연과 관광객유치를 위한 프로젝트를 재개하였고, 이 때문에 이번 가을에 북한을 방문한 대부분의 남한 인사들이 이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도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지원한 농기계조립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가 아리랑을 관람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와 동행했던 많은 북한연구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역사적 이벤트”를 꼭 보고 싶어했다. 남북화해와 교류가 진전되면 이처럼 대규모적인 집단행사가 불가능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3년전 한 잡지에 북한의 집단체조를 기록한 비디오를 분석하여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직접 집단체조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썼다는 점 때문에 마음 한쪽에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이런 찜찜함을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셈이다. 직접 보고난 후의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실제 작품이 공연되기 직전의 체육관의 분위기와 관객들의 관람의 태도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수확이었다. 카드섹션의 담당자들이 평양의 구역별로 구성된다는 점, 출연자들이 꼭 한 장면만 출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북한 전역에서 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모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인민들은 옥류관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밤에 아리랑을 구경하는데, 이들에게 평양구경의 의미는 각별한 듯 했다. 남한에서 집단체조는 비록 낯선 용어이지만, 이의 다른 표현인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은 군부권위주의를 경험한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다. 비록 북한에서보다는 훨씬 소규모이고 비체계적이었지만, 남한에서도 학교행사나 전국체육대회에서 자주 시행되었다. 남북 모두 이런 행사가 있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집단체조가 일제의 유산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북한의 집단체조를 단지 일제의 유산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히 오류이다. 집단체조가 북한에서 발전해온 과정, 참여와 동원의 구조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검토 위에서 이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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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집단체조는 체육행사이자 문화예술행사이며, 동시에 정치행사이다. 이는 ‘혁명역사’와 정책의 성과 등을 종합한 정치예술장르로, 항상 똑 같은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정치적인 문제를 체육예술적으로 표현한 ‘체육예술작품’이다. 북한에서 집단체조는 1946년 5월부터 2002년 2월까지 84개의 작품이 창작되었으며, 총 900여회에 걸쳐 공연되었는데, 연인원 1,600만명이 관람하였다고 한다. 북한의 집단체조는 외부세계에 대한 선전의 수단이면서 비록 미약하지만 문화적 ‘수출’상품의 하나라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내부의 주민들에 대한 정치교육프로그램 중의 하나이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무차별적 폭격에 의한 피해,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엮어서 체제에 대한 긍지와 충성을 이끌어 내며, 이를 관념적 교육이 아니라 몸을 통한 집단적 훈련과 퍼포먼스를 통해 신체에 각인시킨다.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집단예술체조를 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의 훈련을 한 사람만이 가능한 어려운 동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집단체조의 수행자들은 고난도의 체조나 무용을 할 수 있는 훈련된 신체를 갖고 있다. 또한 배경대의 일사불란한 카드섹션과 기법들은 북한만이 갖고 있는 자원임에 틀림없다. 이런 류의 집단체조는 북한에서만 창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회체제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북한의 집단체조가 총체적 동원형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북한 체제의 동원력의 지속여부가 곧 집단체조의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맞는 말이기는 하나 좀 단순한 것이다. 집단체조 나름의 생존력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내부적 사회통합의 효과를 가지면서도 외부로부터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효한 이벤트이므로, 조건이 달라지면 그것은 다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적 상품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집단체조의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요소를 결합시켜 집단체조를 종합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출연자의 더 많은 노력과 다기능형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투여되어야 한다. 장기간의 훈련, 여타 생산활동의 희생은 더 많은 보상을 필요로 한다. 집단체조가 정치교육의 장치로부터 문화적 관광상품으로 성격이 전환되어 간다면, 집단체조의 내용은 정치적 맥락보다는 수요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되어 가지 않을 수 없고, 참가자들에 대한 보상도 점차 사회심리적 보상 위주로부터 경제적 보상위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는 이미 2002년의 아리랑에서 감지되었다. 이번에 공연된 아리랑은 2002년에 공연된 작품보다 군사적인 요소가 많이 약화되고 교예라고 불리는 서커스적 요소, 그리고 영상적 재현의 기법들이 더 많이 포함되었다. 이런 변화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지금 알기는 어렵다.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집단체조를 보고나면 실제로 이 집단체조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평소에 어떻게 연습하는지,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에 대해서 더 궁금해진다.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직접 을 관람한다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난 9월 평양에서 매일 오후 4시쯤이 되면 시민들이 행사용 꽃술을 들고 이리저리 바쁘게 지나다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의문들을 북한 안내원들에게 자주 질문했지만, 이들이 모두 10월의 행사준비에 바쁘다는 답을 들었을 뿐, 속 시원한 답은 듣지 못했다. 이런 궁금증은 이번 가을에 서울에서 상연된 짧은 다큐멘터리 영화, ‘어떤 나라’를 통해 약간은 풀렸다. 이 영화의 제목은 ‘A State of Mind’인데, 굳이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어떤 나라’보다는 ‘마음의 나라’가 더 정확할 것이다. 이 다큐는 2003년의 평양의 두 여중생 가족의 일상생활을 찍은 것인데, 어떻게 이런 인터뷰와 촬영이 가능하였을지 또 다른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집단체조 연습상황과 함께 북한 인민들이 겪은 역사적 경험, 그리고 현재의 평양 중상류층의 일상생활이 잘 드러나 있다. 집단체조의 연습장면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고, 집단체조후의 보상은 텔레비전 수상기를 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이를 통해 북한의 청소년, 특히 평양의 학생들에게 집단체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집단체조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는 잘 변화되지 않는다. 워낙 2000년 당시의 남한의 시민들이 북한의 집단체조를 보고 난 첫 소감은 감탄과 두려움, 또는 경악이었다. 이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감탄의 강도는 좀더 약화되고 경악이나 두려움은 씁쓸함으로 바뀌고 있다. 아직도 미국의 입장이 변수이기는 하지만, 북한 핵위기가 해결의 가닥을 잡은 상황은 이런 씁쓸함을 더 짙은 색깔로 물들인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착잡한 생각들이 이런 변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