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의 미약한 첫걸음
photo1 1945년 해방 이후 여성들에게 닥친 과제는 전근대적 성 불평등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1950년대 이래로 계속된 가족법 개정운동은 이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2005년 폐지되기에 이른다.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노력들이 전근대적인 성차별을 극복하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1948년 7월 17일에는 대한민국헌법에 남녀평등권이 명시되어, 성 평등이라는 기본적인 이념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50년대는 전쟁과 분단의 시기였다. 많은 여성들이 전쟁으로 인해서 남편을 잃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 받았다. 여성 이산가족들은 가장이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갔다. 생계를 위해 일을 찾아 나서야 했던 여성들은 다양한 경제활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의 여성운동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등 여러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나 여류 명사 중심, 국가권력기구와의 유착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60·70년대, ‘공순이’의 희생과 여성에 대한 억압 photo2 여성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과정에 철저히 동원되었다. 주로 농촌 빈민의 딸들이 도시로 올라와 가혹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렸고,‘공순이’라 불렸던 이들 여성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인권유린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여성노동운동은 성 평등 이슈보다 노동문제에 더욱 치중했다. 반도무역, YH상사에서 일어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80년대 이후의 노동자대투쟁, 현재의 비정규직 철폐 여성노조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기선미 부장은 이러한 여성노동운동에 대해 “70년대 경공업에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이 생존권을 위해 벌였던 투쟁, 민주노조건설운동 등의 운동에서 생리휴가 출산휴가 등 여성문제에 관련한 것도 제기되었다”며, “여성운동, 민주화운동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이들이 80년대 여성운동의 한 세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됐던 ‘가족계획’도 여성의 몸을 희생시켜 국가를 통제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70년대 해외 취업 노동자들의 아내들, 이른바 ‘사우디 부인’으로 불렸던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국가·기업들에 의해서 통제와 감시를 받았다. 이처럼 정부는 여성들의 희생과 여성에 대한 감시·통제를 통해서 국가발전을 꾀했다. 80년대, 성 평등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이 시작되다 80년대 초반까지의 여성운동은 계급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일부였고 주로 그 맥락 속에서 읽힐 수 있었다. 그러나 87년 민주국가건설이라는 범국민적 염원이 달성됨에 따라 여성은 ‘성 평등 문제’에 대해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80년대 초반부터 젠더의 관점으로 기반을 닦아 온 ‘한국여성의전화’와 87년 새롭게 출범한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각종 여성단체들은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86년 발생한 ‘권인숙씨 부천 성고문사건’과 이에 대한 여성운동계의 대응은 새로운 여성운동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성고문대책위원회’를 발족한 여성단체들은 이 문제를 국가폭력문제로 접근했던 다수의 시각과는 달리, ‘여성의 문제’로 사건에 접근하였고 성 평등문제를 이슈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한우섭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는 “권인숙씨 사건에서 ‘여성의전화’는 성폭력을 ‘우리의 이슈’로 접근하여 문제 해결에 노력했다”고 당시 상황을 말한다. 이후 잇달아 발생한 변월수씨, 김부남씨 성폭행 사건들에서 여성단체들은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목소리를 냈고, 91년에는 ‘성폭력특별법 제정특위’를 결성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법제화와 다양화라는 꽃을 피우다 photo3 성폭력특별법제정특위 등으로 시작한 90년대 이후의 여성운동은 법제화와 다양화라는 특성을 드러냈다. 꾸준히 제기해왔던 성폭력특별법을 비롯하여 가정폭력방지법 및 성차별금지법, 여성발전기본법,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었고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또한 제2정무장관실에서 여성부로 이어지는 정부 내 여성정책기구의 탄생은 여성문제를 제도권 속으로 끌어들였다. 한편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을 통해 군위안부문제가 ‘여성폭력’의 관점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조직되면서 기지촌여성에 대한 이야기도 공론의 장으로 한 발짝 나오게 되었다. 법제화를 통해 제도권 안으로 진입하게 된 여성운동은 ‘다양화’라는 꽃을 피우게 된다. 일반 여성문제에서 다소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장애여성, 동성애여성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조직’이 결성되어 장애여성의 문제를 전반적인 여성문제 속에서 바라보기 시작했고 여성장애인대회를 열기도 했다. 한편 94년에는 여성 동성애자 인권모임 ‘끼리끼리’가 결성되어 작지만 필요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여성운동 내의 다양화와 차별화의 양상은 운동방식의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과거 ‘운동’이 권위적이고 수직적이었다면 90년대 이후의 여성운동은 ‘문화’라는 코드를 통해 수평적 네트워크를 모색하고 있다. 성추행범의 혀에 상해를 입혀 형을 받은 ‘변월수 씨’ 사건을 영화화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가 탄생했으며, 이후에도 영화 등 대중적인 문화장르를 통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많은 대중의 집중을 받고 있는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과 그 후신인 ‘포르노 포르나’도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문화 행사들은 학생과 지식인 층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수평적 네트워크 구축에 한 몫을 한다. 최근 여성의 전화 각 지부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역여성운동도 다양한 여성운동방식의 한 축을 보여준다. 한우섭 공동대표는 “여성의 전화 각 지부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여성부문 예산을 검토하는 것은 물론 ‘평화마을 만들기’ 등 생활문화운동도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역여성운동 역시 대도시, 지식인 여성 중심이었던 운동에서 보다 수평화 된 여성운동으로 향하게 하는 초석이 되고 있다. 새로운 공생의 장을 향해 다가가야 photo4 그러나 90년대 이후 꽃핀 여성운동이 밝은 면만 가진 것은 아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여성 노동자의 약 70%는 비정규직에 머물고 있으며, 공적 영역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아직도 ‘주변인’이다. 특히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김기선미 부장은 “비정규직 고용불안정문제가 심각한데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성별 분업노동을 이용하고 있다”며, “가부장적 사고의 폐해를 이용하여 여성임금을 착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그동안의 여성문제해결이 주로 ‘남성제도권내 여성의 진출’, ‘여성 피해의 예방과 구제’의 측면에서 이뤄졌기에 여러 부작용이 발생했다. 소위 ‘남성의 세계’에 여성이 진입하는 식의 구도에서 남성은 여성을 경쟁자 혹은 침입자로 인식했으며, 고용할당제 등의 제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또한 제도권 내로 진입하게 된 여성운동은 비판의식의 부족과 고유의 정신이 퇴색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우섭 공동대표는 “80년대 반체제적 여성운동이 제도권 속 여성운동이 되면서 고유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부족해졌다”고 지적한다. 정현백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남녀 사이에 한정된 자원의 배분을 놓고 벌어지는 제로섬 게임도 중요하나, 이제는 시너지 효과를 더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며 “그간의 여성운동이 ‘끼어들기’와 ‘새판 짜기’에서 방황했다면, 향후에는 좀더 후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제 여성운동은 ‘새로운 공생의 장’으로 더욱 다가가야 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