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해 보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서울 거주 6개월 경력의 내가 가이드를 한다니, 오히려 나부터 먼저 가이드를 구해야 할 처지인데 말이다. 길 모르면 물어보고, 말이 안 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하면 되리라는 뻔뻔한 생각으로 마음을 다지면서 약속장소인 혜화동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KEEP2002 가이드를 맡게 된 변인희라고 합니다. 앞으로 며칠동안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 나눴으면 하구요. 정말 반갑습니다” 처음 만난 그분들의 얼굴은 나주에서의 농활로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이미 8일간의 힘든 일정을 지나온 후인데도 모두의 얼굴이 생기 있어 보여 나도 덩달아 힘이 났다. 열심히 해야지. 다함께 외쳐라, 미군철수 매주 금요일에 있는 미군반대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도착한 용산 미군기지 주변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띄엄띄엄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전경들을 보니 별 다른 일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라 왜 저렇게 전경들이 모여 있느냐,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느냐는 질문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라는 궁색한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모두들 알고 있다며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오히려 길을 지나가는 미군들이나 우리를 취재하던 기자에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내가 미쳐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도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우리는 피켓을 손에 쥐고 구호를 크게 외쳤다. “미군은 사죄하라! 미군은 이 땅을 떠나라!” 집회에 참가하셨던 분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의정부에 있는 미군기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정부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얼마 전 인사동에서 ‘언니들 내음’이라는 전시회를 주최하기도 했던 성매매여성지원센터 새움터였다. 그 곳에서 성매매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비율이 5명중에 1명꼴 이라는 선뜻 와 닿지 않는 통계 수치를 보며, 기지촌이나 윤락업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상황은 심각했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미군에게 전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분명히 많은 한국인들이 그 체제의 유지에 동참하고 있으므로. 새움터를 나선 우리는 주한미군기지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 일대의 모든 시설과 가게와 사람들은 미군기지를 기반으로 해서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미군기지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 땅의 것이 아닌 거리와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 친구 중에도 주한 미군에 지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의 선택이 바뀔까요? 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라(25·LA)는 개인의 선택은 순전히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미군들이 만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조건이 더 좋다면 ‘자신은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변명 하에 얼마든지 손쉬운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 그도 가해자가 되어 버리는 거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들의 논리에 동화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한국’이란 나라를 아십니까 둘째 날엔 두 번째 일정부터 함께 했는데, 오전에는 북한산 살리기 운동 본부에 다녀왔는지 모두들 뺏지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뒤이어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딴생각’을 방문하고, 곧장 건대로 향했다. 한총련 5대 의장을 지낸 강위원씨를 비롯한 한총련 간부들과의 만남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로 옮아갔다. “저의 시각에서는 민족주의란 것이 껍데기 밖에 없는 엉성한 개념으로 느껴졌습니다. 민족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개념인데, 이것이 어떻게 반역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어떠한 변화든 이러한 민족주의가 바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반역이 아니라 변혁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비단 이렇게 말한 혜원(26·New York)씨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모두 긍정적인 관점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교포 사회에서 민족주의라고 하면 대단히 편협하고 ‘비어있는’ 사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면서. 이 곳에 와서 민족이란 것, 조국에 대해 명확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민족주의란 이데올로기가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러한 감정을 하나의 이데올로기 안에 포괄하는 것은 어쩌면 큰 오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미국 사회에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한국인이지만, 그 ‘한국’과 뚜렷한 접점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민족이란 개념이 막연하게 느껴졌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 논의에 대해 완벽한 동조도 그렇다고 어떠한 답변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 한국인이란 것을 느끼는가? 차라리 다함께 대~한민국을 외칠 때라고 하면 더 그럴싸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오히려 한국 사회의 모순들을 직시하고 무언가 발언을 할라치면, 이것이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내 상처구나…라고 생각되기보다는 허공에다 외치는 듯한 절망감이 들었다는 편이 더 정직할 것이다. 오히려 민족주의란 개념이 ‘minority report’를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된 경우들을 생각하자니 머릿속이 한없이 꼬여갔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곧장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다른 시선, 같은 마음으로 바라본 오늘의 한국 다음 날은 8월 14일이라 광복절 전야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집회에 함께 하기로 했는데, 전경들이 워낙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어서 도저히 불가능했다. 지금이 가이드의 역량을 보여주어야 할 때인데! 정말 진땀이 났다. 다행히 어렵사리 연락이 돼서 정신대 할머니들과 함께 탑골 공원에서 예정대로 집회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난관이 버티고 있었다. 함께 구호를 외친 다음 일본대사관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던 우리는, 종각역에 다다를 무렵 전경들의 저지로 인해 걸음을 중단해야만 했다. 할머니들과 몇몇 관계자들만 일본대사관으로 향할 수 있었고, 우리는 방향을 틀어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 결국 우리는 능청스럽게 외국에서 관광 온 사람들인데 인사동으로 가려한다고 갖은 핑계를 대면서 겨우 일본대사관 쪽으로 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전야제에 참석하기 전에 평등노조 성수지부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오신 코쿤씨와 나시르씨와 함께 ETUMB(Equality Trade Union Migrants’ Branch)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책에서 읽은 적이 있기에 낯설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보고, 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은 상상보다 더한 것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도착한 8·15 전야제 행사장에서는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벌써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면서 행사를 마친 후,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서서히 하늘이 밝아왔다.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저런 일들을 보면서 KEEP에 참가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라는 물음.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무척 당황했고,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머리를 싸매야 했다. 머릿속에서 생각해오던 것들과 눈앞에 보이는 상황들이 어지럽게 부딪혀서 결국 완결된 문장을 만들지 못하기 일쑤였다. 오랜 세월 동안 조금도 빛 바래지 않은 아픈 과거 앞에선 나도 완벽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김치와 불고기, 남대문과 불국사 같은 몇 개의 아이콘으로 한국이란 나라를 기억한다. 혹은 아직도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분단국가로 인지하거나. 하지만 단촐하기 그지없는 그 몇몇 단어들 속에서 이 땅의 현실은 묻혀지고 가려고 잊혀질 수도 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독특한 이미지를 정립하고 홍보하는 것이 분명 국가 이미지나 관광 수익에 큰 도움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작 한국인들조차 그러한 이미지의 망령에 속박된 것은 아닌지 곰곰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결코 한국의 전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조차 어쩌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공론화된’ 부분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KEEP일정동안 재미교포들이 경험한 현장은 화석화된 유물이 아니라 엄연히 현재진행형인 한국의 생생한 삶, 그 자체였다. “아주 큰 숙제가 주어진 느낌입니다. 이제 돌아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지요.” 환송회 자리에서 누군가가 했던 말처럼, 나도 꼭 같은 기분이다. 그 숙제를 언제 끝낼 수 있을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번에 가이드 했던 것보단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