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기자가 선정한 ‘나의 베스트 기사’

당신의 삶에 주제를 던져라 1996년 9월호 (통권 10호) 의 커버스토리 주제실천형 운동에 관한 기사로 운동에 관한 총론과 노동, 성, 인권에 대한 글들과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총론에서는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모순의 지속과 그러한 모순의 현장에서 변혁을 꽤하고자 했지만 별다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운동 사이에서 제시되고 있는 주제실천운동이 무엇인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

당신의 삶에 주제를 던져라 1996년 9월호 (통권 10호) 의 커버스토리 주제실천형 운동에 관한 기사로 운동에 관한 총론과 노동, 성, 인권에 대한 글들과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에서는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모순의 지속과 그러한 모순의 현장에서 변혁을 꽤하고자 했지만 별다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운동 사이에서 제시되고 있는 주제실천운동이 무엇인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 주제실천 운동이란 변화된 현실을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써 타개해 나가고자 하는 운동으로 계급운동과 반편향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가면서 서로를 보족할 수 있는, 그래서 운동의 급진성을 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운동의 기반을 세우고자 하는 주제실천운동에서는 자치를 핵심가치로 부각시키고 있다.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계몽하는 운동을 넘어 스스로를 규율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위임된 통치, 대의제 민주주의의 허구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운동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자치는 의제설정과 연대라는 원리를 동반하여 현실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군들에 대한 구체적인 의제를 선정하고 운동단위들간에 그리고 사회운동과의 열려진 연대를 실현하며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진보를 일궈내고자 한다. 학생운동 또한 기존의 학생회 구조와 학생활동가의 개념에서 탈피해 다양한 학생자치권력들을 보족해주고 참여 공간을 함께 기획해 줄 수 있는 수평적 동반자 관계로의 학생회, 좀 더 개방적으로 사회운동과의 열려진 연대를 실현하며 사회에 나가서도 다양한 운동의 흐름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운동가로서의 마인드를 가지는 학생활동가로의 혁신을 제기하고 있다. 노동문제에서는 노학운동의 혁신과 경제 민주화운동에 관해, 성문제에서는 성정치에 관해, 인권문제에서는 인권의 역사와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인터뷰에서는 그 밖의 환경,교육등에 관해 그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로 끝을 맺고 있다. ‘당신의 삶에 주제를 던져라’ 라는 말은, 그간 주어진 대로의 삶을 묵묵히 견뎌내며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곳’ 이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대학이란 곳에 들어왔지만 막상 별반 다른 것 없는 듯한 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을 대부분의 새내기들에게 매우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이 이 기사를 관심 있게 들어다 보고자 한 이유였으나 막상 펼치고 보니 예상하고 있던 바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통 고등학교 때 떠올려보던 운동이란 이미지는 화염병을 들고- 이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인지도 모르겠지만- 거칠게 시위하고. 시끄럽게 집회하고 그저 한낮 소리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쏟아 내는 모습들이였다. ‘운동권’이라 하면 인상을 찌푸리기부터하는 사람들 대부분도 대개는 그간의 운동들에서 보였던 성격들-과격하기만 하고, 실천력 없고 등등-때문에 ‘운동’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멀리하는 것일테고 말이다. 이렇게 허황된 구호로만, 특수한 집단만의 문제라고 생각되던 운동이라는 범위를, 좀 더 넓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지닌 주제실천형 운동에 대한 글들을 보면서 기존 운동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관념들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다. 자신들의 일에만 여념 없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은 현재 우리 세대들에게는 이러한 접근을 통한 ‘운동’이 좀더 설득력을 가지기에 수월하지 않을까? 자기도 모르게 베어있는 습관처럼 ‘운동’이란 것도 기존의 특수성과 제한성에서 벗어나 우리의 생활,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레 함께 해나갈 수도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말이다. 관악의 소통문화 짚어보기 1999년 4월호 (통권 30호) 커버스토리 관악의 소통이라는 주제로 언론·출판매체, 대자보와 SCCR, 집회에 관한 글과 소통의 부재에 대한 기고글, 기획에 대한 정리글로 구성되어 있다. 언론·출판매체에 관한 글에서는 비교적 손쉽게 접해볼 수 있는 학내의 언론매체들- 대학신문, 교지관악, 우리세대- 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이러한 학내 언론사들이 가지는 한정적인 소통양상, 경직성 등에 대한 우려와 함께 출판매체들-그날에서 책읽기, 라면 등-이 가지는 새로운 소통방식으로서의 가능성-관악 소통 패러다임의 역동적이며 다양한 변화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에 대한 기대를 내비치고 있다. 대자보와 SCCR(나우누리에 있는 서울대 통신 연구회)에 관한 글에서는 대학토론문화의 주춧돌로서의 자보의 역할 및 기여에 대한 내용과 동시에 자보가 가지는 그 한계성- 개방성 안에 숨겨진 제한성과 같은-에 대하여 대안적 기능을 가진 SCCR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고글에서는 소통 부재의 원인을 주변이 아닌, 소통의 주체인 우리들로 돌려 소통을 위한 내적준비, 진정한 소통에의 의지에 대한 적극적 자세의 필요를 이야기하고 있다. 집회에 관한 글에서는 그동안 암묵적으로 저항성과 운동성을 담보해내야 함을 강요당했던 아크로 내에서의 집회가 이러한 성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들로 인해 점차 변화되고 있음을 다양화된 소통의 생성과 증가의 현상으로서 바라보고 있으며 이와 함께 기존에 존재하는 부분과 새로이 생겨나는 부분들간, 각각의 내부적 소통을 어떻게 외부적 표출시켜 서로간의 소통을 이룰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지고 있다. 정리글에서는 대학이라는 공간은 대학문화라는 특수한 공동체 기반과 함께 다른 사회의 공간에 비해 비교적 많은 소통의 기제와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에의 불만을 가지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소통의 중심을 ‘나’로 두고, 우리가 그동안 포섭되어야 할 ‘타인’으로 규정해왔던 소통의 객체를 ‘각기 다른 우리’로 인정하고 ‘당위성’이 아닌 ‘공통의 주제’로부터 여러 ‘우리’들을 모으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대학이라는 말을 떠올려 볼 때 막연히 가지게 느낌 중 하나는 ‘자유롭다’라는 것이였다. 무언가에 대한 얽매임 없이 생각하는 바, 하고자 하는 바를 내보일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곳이라는 생각. 아마도 이는 그 간의 교육기관에서 경험해보지 못했을-가능했다하더라도 그 정도가 매우 미비했을- 상호간의 의사전달, 즉 ‘소통’이라는 것이 가능한 대학사회내의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가능한 것 뿐만아니라 대학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기도 하다-. 이러한 대학에서의 소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떠한 형식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곧 내가 대학안에서 가지는 소통의 정도를 파악해보는 것과도 무관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동안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소통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이러한 이상적인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곳에서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들은 더욱 깊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덧붙여본다면 얼마전부터 언론매체에 발을 들여놓게 된지라 더더욱 소통이라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현재로선 내가 꿈꾸던 이상적 소통에 대한 만족을 현실에서 느끼고 있지는 못하지만 단순히 ‘역지사지’로서의 식상하고 막연한 대안이 아닌, ‘각기 다른 우리’로써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감에 따라 그런 소통의 막힘을 풀어나가고자 했던 새로운 해결의 시각을 보면서, 다시금 내가 꿈꾸던 진정한 소통에 대한 기대가 생겨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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