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바쁜 일정에 노무현 고문은 약간 피로해 보였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선뜻 일어나서 먼저 악수를 청하며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를 했다. 여러 개의 소파가 있는 사무실에서 바짝 붙어 앉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 : 대표적 진보 인사 3위에 뽑히셨는데 어떠신가요? 노무현(이하 노) : 서울대 학생들이 어떤 의미로 저를 진보적 인사로 뽑았는지 궁금합니다. 어쨌든 기분은 좋습니다. 기자 : 우리사회에서 ‘진보’는 무엇이며, 우리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상향’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노 : 진보는 어떤 특정 국면에서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념적으로는 아무리 진보라 해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특정국면에서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것은 더 이상 진보라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의 진보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 우리사회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구조적 장애물을 혁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의 핵심적인 개혁과제는 동서통합과 남북통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봅니다. 온전하게 통일된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현 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진보진영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 ‘진보’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20세기 동안 ‘사회주의’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 :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해 ‘호불호(好不好)’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이 좀 난감합니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하나는 사회주의의 인간이해에 결함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인간이 정의, 평등과 같은 이상적 가치,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경제적 이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도외시했다는 점이죠. 다른 하나는 현존 사회주의국가가 변화와 개혁을 수용하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상대적 성공은 그런 점에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 대우차 사태 때 드러난 노 고문 님의 모습이 과거에 울산에서의 모습과 정반대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예전보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 : 과거 현대자동차 파업 때는 공권력 투입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울산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최근 대우차 사태에서 노동자들이 대우차 해외 매각 저지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우차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주관적으로 무엇이 더 노동자를 위하는 길인가를 생각해보았을 때 해외 매각을 통해서 일자리를 최대한 보장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자 : 노무현 고문께서는 DJ의 개혁을 적극 옹호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DJ의 개혁이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진보 진영에서는 DJ의 정책을 ‘신자유주의적이다’라며 비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 : 우리사회가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노력했다는 점에서 명백히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DJ의 개혁정책은 기본적으로 이념 지향적이라기보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입니다.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의 개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DJ의 개혁을 한꺼번에 신자유주의적이라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굳이 평가한다면 명백히 개혁 지향적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양한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 현재 민주당 내에서 개혁진보세력의 대선 주자로 노무현님과 김근태 의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근태 의원이 아닌, 노무현님이 반드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노 : 김근태 의원은 조그만 이익에 조그만 자리에 나라의 운명을 그르치는 그와 같은 졸렬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적어도 다른 부분은 김근태 최고위원에게 모자라도, 그 부분만큼은 김근태 의원에게 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음 시기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국민통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서 통합은 합리적 정치가 가능하게 만들 토대입니다. 따라서 지역기반에 기대지 않고 전국의 고른 지지를 받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민통합을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지금 우리 민족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풀어 갈 수 있습니다. 호감도가 가장 높고 전국 어디에서도 거부감이 없다는 점에서 저는 지역갈등을 부추기지 않고 당선될 수 있습니다. 기자 : 지난 대선 에서 김대중 후보와 권영길 후보를 놓고 고민했듯이, 이번 대선 에서도 노무현님과 진보진영의 후보를 놓고 고민할 학생들이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학생들에게 노무현을 뽑아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노 : 우리가 살집을 선택하듯이 선거에서 국민들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완벽한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지도자 중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사회 전체를 진보적으로 만드는데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도자를 고르는 것인 전략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나라도 6월 항쟁이라는 시민혁명을 겪었고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위 진보진영이 내세우는 주장을 가지고는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없습니다. 정치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승리해야 그 진영이 가진 정치적 이상과 포부는 현실에서 실천되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 승리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교훈을 만들고 싶습니다. 기자 : 서울대학문제는 한국사회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심지어 존폐문제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서울대학의 문제,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의 학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노 : 사람들은 자기 밥그릇은 잘 안 내놓으려 하면서 ‘개혁’은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살을 먼저 깎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우 서울대학이라는 단일 대학의 지배력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서울대 내부에서의 ‘제 살 깎기’를 먼저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사회의 학벌문화는 비단 서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높은 교육열과 같은 전통적 가치의 문제, 학벌에 따른 임금격차와 같은 사회경제적 구조 등 우리사회의 전 영역이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고, 전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총체적인 노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자 : 좀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노무현 고문님의 20대는 어떠했습니까? 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깐 취직을 했다가 바로 군대에 갔어요. 최전방에 있었죠. 그리고 틈틈이 시험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처음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나중에 사법고시 공부를 하게되었습니다. 기자 :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노 : 한순간 순간마다 어려웠던 적인 많지만 군대에 있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네요. 군대에서는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강요받을 때가 많죠. 그럴 때마다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살아오면서 실현가능한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속박을 받을 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튄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 것이 성격 탓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사리를 따지려고 불합리한 일에 저항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기자 : 마지막으로 서울대생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노 : 주어진 환경을 누리는데 부담을 갖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생으로서 나중에 사회에 기여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위해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대학생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