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의 어느 날, 노천강당에는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 김수행 교수님의 맑스 경제학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 어느 시대 어떤 공간에서라도 사회의 진보를 고민하는데 있어 맑스는 비껴갈 수 없는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대학 사회에서 맑스를 강단에 올리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89년 경제학과 대학원 학생들의 데모를 통해 서울대 교수가 되신 이래로 10여년 맑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신 경제학과 김수행 선생님을 만나 그분의 이념과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봉천 네거리 한 허름한 전통 술집은 김수행 선생님의 단골집이다. 그곳으로 찾아간 우리에게 선생님은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을 하나씩 시켜주셨다. 어젯밤 과음으로 속이 쓰린 나에게는 눈물나게 고마운 선물이었다. 선생님이 권한 모주를 한잔 들면서 맑스 경제학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 보았다. 기자 : 선생님 저도 선생님 책도 좀 읽고 강의도 들었는데요..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어떤 때는 맑스 경제학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때는 근대 경제학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선생님 : 많이 헷갈려들 하는 것 같더군. 사실 맑스 경제학 듣는 우리 경제학과 학생들도 많이 헷갈려 하는 것 같애….시험 치면 잘 못 치더라구..(웃음) 근대 경제학과 맑스 경제학의 가장 큰 차이가 이윤의 원천을 설명하는 거야. 근대 경제학에서는 뭐 경영자가 위험을 무릅쓴 대가로 이윤이 생긴다고 하지만, 위험을 무릅쓴다고 해서 이윤이 나오는 건 아니거든. 리스크가 아무리 높아도 거기서 이윤이 창출되진 않아. 리스크의 보상으로 일정정도 이윤을 가져갈 수는 있겠지만…근대 경제학으로는 이윤이 어디서 나오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 공황도 마찬가지지. 근대경제학에 따르면 시장에 의하면 모든 것이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바로 그 반례가 공황이잖아. 근대 경제학은 공황을 설명하지 못하거든. 내가 박사과정을 선택할 때가 1970년대 공황기였는데 그런 근대 경제학의 한계 때문에 맑스 경제학을 선택한 것도 있지. 그렇다면 맑스 경제학에서는 이윤 창출을 설명할 수 있을까? 맑스 경제학에서는 상품이 화폐로 전환되는 과정 가운데 유통이나 판매 등은 그 자체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는 없으며 오직 생산과정에서만 잉여가치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은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때 임금노동자는 임금액에 해당하는 노동(필요노동)뿐 아니라 자본가를 위한 잉여노동을 하게 된다. 이 잉여노동이 바로 이윤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즉 맑스 경제학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선한’ 자본이라도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기자 : 선생님 홈페이지에서 글을 봤는데, 영국의 복지 제도에 대해서 상당히 칭찬을 하셨더라구요. 그런데 복지제도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은폐하는 일종의 포섭책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선생님 : 그렇지. 포섭책이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복지를 추구하지 말라는 건 또 아니잖아. 시민운동이나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서도 개량적이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몫을 못 찾고 가게 되는 거야. 나는 무엇이든 사회를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거면 좋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더 못살게 해야 혁명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난 그건 틀린 소리라고 생각해.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그 남는 시간으로 자신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하나씩 변해 가면 언젠가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는 거지. 공동 생산하고 공동 분배하는 그런 사회 말이야. 기자 : 그렇지만 현존 사회주의 국가는 실패했는데..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해서가 아닌가요?선생님 :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인 물품들을 생산하는 것과 자본이 이윤추구를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야. 사회주의의 핵심은 경제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야. 노동 해방, 인간 해방이지. 현존 사회주의 국가가 망한 것은 당와 관료 중심주의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으니까 국민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창의적이고 헌신적으로 임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기자 : 자본주의의 현재적 형태는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 일텐데..선생님 : 세계화는 선진 자본이 후진국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이야. 이 과정에서 세계적 부의 불평등도 심화되고 경제의 흐름이 갈수록 불안정해지게 되지. 초단기로 자본이 들어왔다 빠져버리면 후진국 경제만 당하는 거지. 1945~74년까지는 케인즈 주의가 번성해서 자본에 대한 국민국가의 통제가 강했는데 그 후로 자본에 대한 통제나 제제가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어. 문제는 더 심각해졌고. 국민국가나 국제기구의 차원에서 자본의 이윤추구를 제재해야 해. 특히 국제기구가 민주화될 필요가 있어. 주식회사(!) IMF는 완전히 미국 맘대로 하는 거 아냐. 초국적 자본 앞에서 국민국가의 제재력은 한계적일 수 있겠지만 씨애틀이나 프라하 등지에서와 같은 투쟁으로 하나씩 만들어 가는 거지. 학교에 다니면서 조금쯤 맑스주의 경제학을 접하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이론적으로 이해가 가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생각하기 피곤하고 골치 아픈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더구나 당장 눈앞에 나의 미래와 가족의 미래가 있다면. 돈이 없어 고등학교 진학도 다시 고민해야 했었고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선생님은 어떻게 맑스를 평생 공부하시게 되었을까? 선생님 : 맑스를 공부하게 된 건 중, 고등학교 때 나랑 같이 공부하던 애들이..나보다 훨씬 뛰어난 애들이 많았는데..돈 때문에 공부를 계속 못하더라구..왜 그래야 하나..왜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 공부를 못해야 하나..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 과정은 사실 힘들었지.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남산 가서 고문도 받아 봤고….그런 일이 많았지. 89년엔 내가 국내에서 최초로 자본론을 발간하기도 했었구..그것도 대단한 용기를 냈던 거였지.. 기자: 한신대에서 쫒겨난 일도 있으셨죠? 선생님 : 응..그건..한신대가 그래도 민주화 운동을 꽤 하던 학교였는데..그 내부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어..학교 운영이 완전히 신학부 맘대로 더라구..하루는 교수회의를 하는데 회의하기 전에 기도를 올리기를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이러는 거야. 그게 완전히 신학부 뜻대로 하는 거거든. 그래서 내가 ‘도대체 하는님 뜻이 뭐냐’고 물었거든. 그랫더니 그 대답이 걸작인게..”평신도는 모른다” 이러더라구..내 참 기가 막혀서..그래서 들고일어났다가..결국 나랑 정운영 교수랑 쫓겨났지.. 기자 : 그 뒤에 서울대에 오신 거였어요?선생님 :응..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아서 한 2년 고생했어. 그래도 경제학과 대학원 학생들이 데모를 해줘서 들어올 수 있었지 학생들이 그렇게 안 해줬으면 못 왔을 거야. 여기 교수들이 나 넣어주기 싫어서 신임투표 같은 제도도 신설하고 그랬었지.. 그래도 한신대 나와서 서울대 들어오기까지 2년 남짓 동안 전국 각지에 강사로 돌아다녔는데 그게 결과가 참 좋았어. 그때 나한테 배웠던 학생들이 지금 전국 각지에서 정치경제학 가르치고 있거든.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같애. 그 때 평소에 많이 웃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마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들어오신다. 선생님은 “어 이리로 와” 하고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손에 든 담배가 갑자기 신경 쓰이시는 것 같다….^^; 사모님 : 담배 또 펴요? 그렇게 애써서 끊어 놓은 걸 왜 다시 펴? 선생님 : 이제 이것만 피고 안 필려구..(그러나 선생님은 이후로도 계속 피웠다.. -,-;;) 기자 : 어? 담배 끊으셨었어요? 왜요?선생님 : 아..건강에 안 좋아서.. 사모님 : 에~~이 거짓말은…사실은 담배랑 술이랑 같이 하니까 술이 맛이 없더래..그래서 담배 끊어 놓구선….(웃음) 대학 때 미팅 비슷한 자리에서 만났다는 두 분은 이후에 모 은행에서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되어 결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모님이 오시고부터는 이제 선생님이 하시는 말마다 거짓말이 되는 느낌이다..*^^* 그런데…사모님은 김수행 선생님의 화려한 전적(?)을 알면서도 결혼하고 싶었을까? ^^;; 기자 : 젊으셨을 땐(?) 선생님이 멋있으셨나 보죠? ^^;사모님 : 전혀….(웃음) 지금이야 살이 좀 붙어서 볼만하지..그 땐 집도 가난하고 무슨 운동도 하구 그래서 깡마르고 까부잡잡해서 영 볼품이 없었어..그리고 지금은 좀 괜찮은데..이이가 눈이 좀 찢어져서 무섭게 생겼어.. 기자 : 근데 왜 결혼을 하셨어요?사모님 : 속아서 한 거지 뭐..(웃음) 결혼을 아주 급하게 했거든.. 그 땐 이렇게까지 가난한 지도 몰랐고 이이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어..그냥 회사 다니는 줄 알았지.. 그런데 결혼한 지 몇 달 지나서…우리 사촌오빠가 와서 “야 너네 남편 좀 위험한 일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는 거야. 집 근처에 경찰들이 잠복해 있으면서 동태를 살피더라는 거지..그래서 그날 이이한테 물어보니까 이실직고 하더라구…기가 막히지…근데 어떻해.. 물릴 수도 없구.. 기자 : 어..그럼 사기..결혼..???(웃음)선생님 : 그래도 어떻해. 난 이 사람이 좋구…결혼하고 싶은데..사실대로 얘기하면 오겠어..?? 기자 :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는데요?선생님 : 이 친구는 중산층 출신이라서 그런지….안정적이고 포용력이 있거든..그 점이 참 좋았어… 기자 : 사모님은 많이 힘드셨죠? 선생님 글 보니까 영국에서 유학할 때는 거의 다 사모님께서 벌어서 사셨다든데.. 선생님 : 맞어..난 마누라 장학금(!) 받고 공부했었지..(웃음) 사모님 : 그렇게 고생스럽진 않았어….그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고생이라고 느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그렇지 않겠어..? 선생님을 ‘이이’라 부르는 사모님은 시종일관 선생님의 권위를 마구마구 실추(!)시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한국의 석학 김수행 선생님도 집에서는 “나도 한국가면 알아주는 사람이야..”라고 적극적 자기 PR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라고 한다..^^;; 기자 : 그건 그렇고…..요즘에 정치경제학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많나요?선생님 : 응..아직 많아…사실 기업체에서는 정치경제학 전공한 사람들을 선호하거든..거시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그래도 요즘엔 신자유주의 영향으로..좀 힘들어..그래서 요새는 학생들한테 논문 쓸 때 환경이나 여성 쪽과 접합해서 써보라고 그러기도 하지.. 기자 : 아무래도 선생님 수업 듣는 학생 중에는 학생 운동하는 학생들이 많을 텐데 요즘 학생 운동 보면 어떠세요?선생님 : 글쎄..많이 약해진 것 같애..사회적인 관심도 덜한 것 같고…그건 학교에 자동차 가져오는 학생들이 많은 것과 관계 있지 않을까? 부유한 학생들도 많이 들어오고 전체적으로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요즘엔 내가 운동하는 학생들한테 ‘너넨 공부도 안하고 운동도 안하고 뭐하냐??’ 그러기도 해.(웃음) 사실 한국의 운동은 이제껏 청년 학생들이 선도해 왔었잖아. 나도 몇번이나 연루되었던 국가보안법 같은 경우도 사실 청년들이 나서서 폐지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애. 아니면 최소한 부정부패만이라도.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많잖아. 학생운동이 좀 더 분발해야 할 것 같아. 기자 : 학생운동이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선생님 : 그건 정말 잘못된 일이지.. 운동가는 대중이 되어야지 대중 위에 서려고 하면 안 돼..대중과 함께 하면서 대중을 이끌어 가야 해..구 소련에서 짜르 체제에 대항할 때 어쩔 수 없이 비밀조직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까 비판이 없었거든. 그건 조직이 망하는 지름길이야. 비판이 불가능한 사회는 결코 지속될 수 없어.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진데…나는 중국이 지금 자본주의 국가라고 생각하는데..정치적으로는 독재거든..일각에서는 중국이 이후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 하는데..난 중국이 독재체제로 가는 한 그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기자 : 최근 학생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문제랄까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선생님 : 아무래도 불경기 문제겠지..그건 국민들 생활과 직결된 문제거든. 학생들에게도 어필 할 수 있는 문제고.. 그런데 학생들은 실생활에서 그러한 모순과 위기를 느끼면서도 체제를 바꾸어 이를 극복하려기 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그 체제에 적응해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는 거지..1930년대 대공황이 왔을 때도 그랬어..자본주의의 위기가 만천하에 드러난 게 공황 아냐..그러면 사람들이 노동당을 찍어야 하는데 오히려 보수당이 집권에 성공하거든. 자기 혼자 문제를 해결하지 말고 모두 같이 노력해서 사회체제를 변혁해야 하는데…안타깝지.. 모주는 이미 몇 항아리가 비고 선생님은 적당히 취기가 도신 듯하다. 관악산에 다녀오신 선생님은 츄리닝에 티셔츠, 그리고 야구 모자를 쓰고 계시다. 작은 눈을 찡그러뜨리며 자주 웃고, 툭하면 옆에 있는 학생들에게 술을 권하는 모습은 그저 옆집 아저씨 같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웬지 나와 너무도 멀었던 다른 교수님들의 모습과 겹치면서, 묘하게 애틋한 느낌으로 남는 시간이었다. 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