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새를 위하여

어릴 적 이야기다.동물도감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동생 덕분에 우리집 텔레비전 안에선 매 시간 동물들이 뛰놀았다.보기만 하면 동물 이름을 척척 맞혀버리는 동생 때문에, 동물 다큐멘터리를 볼 때 누가 리모컨을 만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릴 적 이야기다. 동물도감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동생 덕분에 우리집 텔레비전 안에선 매 시간 동물들이 뛰놀았다. 보기만 하면 동물 이름을 척척 맞혀버리는 동생 때문에, 동물 다큐멘터리를 볼 때 누가 리모컨을 만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도 눈 맑은 사슴을 쫒는 치타의 질주를 괜스레 숨죽이며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어미 새가 먹이를 찾아간 사이에 새끼 새를 잡아먹는 불청객을 보면 감독이 왜 저 어린양을 구해주지 않는가에 대한 불만을 동생과 나누곤 했다. 시간이 흘러 나도 머리가 크고 나서는, 그런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다. 동물 다큐가 남기는 것이 약육강식이고 다큐 카메라는 자연의 이치를 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지금 와서 모를 리 없다.에너지 기획 취재를 위해 전화를 돌리던 중 연결된 전화선 너머 들리는 첫 이야기는 ‘나를 도와줘’였다. 이 추위에 거리에 나앉을 것 같은 절박함에 학생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움을 원하는 어르신에게 나는, 다 제쳐두고 당신의 단전의 경험에 대해 물어야 했다. 그 후 상담소에 연락해보고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역시나 내가 깨달은 것은 ‘이 문제도 사회 구조의 차원’이라는 결론과 나의 힘의 한계였다. 과거 한 인터뷰이가 던진 ‘기사만 쓰지 말고 실천을 해보게’라는 한 마디가 허공에서 울려버렸다. 결국 그분과의 마지막 통화는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끝으로, 맥없이 끊어지고 말았다. 실망한 목소리였다. 전화통을 붙잡고 딸만큼 어린 학생에게 도움을 청한 당신이, 자기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지고 또한 부끄럽고 부끄러울 것이다. 그보다는 다져지고 다져진 자신의 컴컴한 현실에 재가 한 줌 더 뿌려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또 취재얘기다. 연탄은행 지원활동을 찾아갔을 때는 그날따라 각지의 언론사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취재열기가 드높았다. 영하의 추위에 연탄이 ‘멋진 그림’이 될 것 같아 발 빠르게 움직인 능력자들일 것이다. 독거노인 분에게 ‘외롭지 않으세요?’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은 끝에 얻은 것은 노인 분의 눈물 한 방울. 펜이 아닌 칼을 들이대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이 글로 실려 누군가에게 읽히겠지만, 후벼진 노인의 마음은 아물고 있을는지 아무도 모른다. 취재가 끝나고 쌩하니 가버리는 그들을 보면서 그날의 추위보다 더한 시림을 느꼈다.모 주간지 편집장은 기자는 ‘협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파헤친다는 기자의 본령 앞에 ‘의(義)’가 있어야만 그의 기사는 누군가에게 읽힐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나의 펜은 누구에게까지 읽히고 어디까지 전달될까. 다큐멘터리의 냉혹함이 당연시되는 것과 기자로서 본질을 꽤 뚫어보는 것은 꽤나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다. 텔레비전 안에서 가엽게 우는 새끼 새를 그저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말고, 브라운관 너머 손을 깊숙이 넣어 그들의 체온을 느껴야 한다. 내 목소리가 멀리까지 들리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은 기자의 본령보다는 숙명인지, 자연의 이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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