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도중 진동이 울린다. 책상 밑으로 스마트폰을 꺼내본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친구가 ‘좋아요’와 함께 댓글을 달았다. 별 내용은 아니지만 친구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나도 댓글을 적는다. 페이스북을 끄고 카카오톡을 연다. 어제 친구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 옆에 숫자가 없는 걸로 봐서 이 친구 읽긴 읽었다. 그런데 답장이 없다. 한 번 더 독촉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단톡방에 들어가니 지난 주말에 방영한 케이블 예능프로그램이 대화 주제다. 나도 한 마디 껴들었다가 눈팅 중이던 편집장에게 딱 걸렸다. ‘기사 마감 안 하냐?’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지 걱정이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생소하던 풍경이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친 이른바 ‘정보통신 혁명’을 거쳐 당시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은 이미 95%에 달했고 휴대폰 보급률은 100%를 넘어섰다. 천리안에서 네이버로, 버디버디에서 네이트온으로 옮겨 가는 흐름은 있었지만 필자는 이미 ‘혁명’이 일어난 판에 더 이상 개인의 ‘커뮤니케이션’에 커다란 변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이를 바탕으로 한 SNS와 인스턴트 메시지 서비스가 널리 퍼지며 또다시 변화가 찾아왔다. 웹 2.0이라는 말은 블로그, 싸이월드와 함께 도태됐다. 언제 어디서나 통신망에 접속할 수 있다는 스마트폰의 특성을 살린, 빠르고 상호작용적인 매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디카로 찍은 사진을 집에 와서 컴퓨터로 옮기고 싸이월드에 올려 올라갈 투데이 수를 기대하는 일련의 과정 대신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현장에서 페이스북에 게시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함께 간 친구들의 이름까지 태그해 놓으면 완벽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보던 친구에게 게시물이 바로 노출되고, 친구가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면 알림까지 온다. 과나 반에서 공지사항이 있을 때도 클럽에 공지를 올리고 일일이 개별 문자를 보내는 대신, 단톡방에 공지를 올리고 옆에 뜬 숫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중독’이다. 어린 시절 지겹게 듣던 ‘바보상자’ TV를 많이 보면 바보가 돼 버린다는 경고로부터 인터넷 중독, 문자메시지 중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독이 있어왔다. 더 자극적인 매체가 등장해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중독이라 부를 만큼 해악이 아니었는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우리 중 다수는 이런 중독에 빠져 바보나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중독의 늪을 잘 해쳐왔다. 근래에 와서도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서 끝없이 오르내리는 ‘스마트폰 중독’도 어찌 보면 새 매체가 겪는 통과의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가족부와 일부 의원들의 게임 산업 규제로 인해 고루한 ‘중독 담론’에 맞서는 것은 마치 ‘독립투사’가 된 기분마저 준다.
그러나 중독과는 다른 의미에서 가끔 내가 스마트폰의 주인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내 주인인가하는 고민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침대에 눕기까지 항상 들고 다니며 필요에 따라 유용하게 사용하지만, 동시에 화면 상단 바를 늘 주시하며, 노란색 사각형 아이콘이 뜰 때마다 이를 없애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어쩌다가 답하기 곤란한 메시지가 오면 큰 딜레마에 빠진다. 노란 아이콘을 지우려면 메시지를 확인해야 하지만 그러면 내가 메시지를 읽었다는 사실이 상대에게 알려지고, 답장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가끔 진동이 울리면 페이스북에 들어가 지구본 모양을 클릭하라는 신호다. 누구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속한 그룹의 공지사항에는 ‘좋아요’를 누르게 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인 친구의 게시물에 ‘좋아요’와 함께 억지로 댓글을 한두 개 남겨본다. 스마트폰은 마치 채권자가 빚을 독촉하듯 메시지를 확인하고 이에 반응해 채무를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물론 오프라인에서의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항상 가는 말이 있으면 오는 말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통신망에 접근 가능하다는 스마트폰의 특성이 우리의 일상에서 혼자 있는 시간과 장소를 모두 대화의 시간과 장으로 바꿔놓는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우리는 SNS와 인터넷 서핑에 빠져 고독을 누리거나 사색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항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스마트폰은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사색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빼앗아 간다.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이 끊임없이 서로의 메시지에 답장을 거듭하지만 ‘웬일인지 우리는 점점 더 내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로 떠밀려간다.’
피처폰 시절, 배우 한석규 씨가 찍었던 광고 중,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 두셔도 좋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오는 통신사 광고가 됐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이 광고는 다시 리메이크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고가 강조하는 것은 휴대폰을 잠시 꺼 두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스님과 함께 걷는 대나무숲처럼 ‘새로운 세상’에서도 휴대폰이 잘 터진다는 것이다. 정말 스마트폰을 잠시 꺼 두어도 좋을까?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을 삭제한 친구들이 얼마 못 가서 다시 설치하게 되는 경우를 보면 쉽지 않은 것 같다. 편리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는 불편도 크지만 이미 주류로 자리잡은 의사소통 수단에서 자신만이 소외되는 것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스마트폰 배터리를 교체하며 이대로 전원을 켜지 않아도 좋을지 한 번쯤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