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진동한다. 나는 그것을 살포시 엎어놓는다. 전화를 건 양반은 주구장창 통화 연결음을 듣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이 자리를 빌려 함께했던 전임 편집장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 기자 시절 마감기간에 나는 당신들의 전화를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안’ 받은 거였다. 쥐어짜내도 문장이 나오지 않아 머리가 대가리처럼 느껴지는 시점, 날 찾는 그대들의 존재는 저승야차보다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랬다. 미안하게 됐다.
업보의 대가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쩌다보니 편집장이 됐고 기사 독촉을 해대는 빚쟁이 짓을 한 학기 동안 하게 됐다. 기자 시절 독촉은 하면서도 화는 내지 않던 편집장들을 보며 나는 이들이 생불(生佛)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내 왼뺨을 치면 오른뺨도 내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지언정 내게 화는 내지 않았다
학생자치언론의 편집장을 한 학기 해보니 전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는 것도 없이 뱉어내라는 요구만큼 미안한 일이 또 있을까.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며 취재를 다니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을 다그칠 때마다 좀 많이 미안했다. 악덕 사장은 쥐꼬리 만한 월급이라도 주지만 자치언론 기자들에겐 보수도 없다.
미안한 사람이 또 있다. 임기 중 발간한 세 호가 제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편집 노동자들의 야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재임하는 중에는 미리미리 잘해서 그분들 야근하는 일 없게 해보자’는 다짐은 무능 탓에 지키지 못했다. 입으로 진보를 외치고 노동을 말하면서 가까이 일하는 노동자의 저녁은 챙기지 못했다.
미안함의 최고봉은 이번 호를 내며 찾아왔다. 기획 설문지를 받으러 학교 여기저기를 후비고 다니는 기자들을 보며 나는 이것을 열정이라 불러야 할지 열정 착취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삽질이라 해야 할지 가늠키 어려웠다. 언제까지 설문을 해야 하고 언제까지 기사를 내야 한다고 말하듯 짖어대는 편집장의 존재는 그들에게 적잖이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열정인지 삽질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지난 2년 간 열정과 삽질 사이에서 요동쳤던 저널의 기자생활을 맺는다. 저널을 집어가는 학우 독자들에게서 <서울대저널>의 구성원들은 또다시 삽질을 시작할 열정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