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우리 가슴에 살아

최우혁 열사를 기억하며
▲ 민주화의 길 안내판. 민주화의 길 지도와 조성 취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적혀 있다.


‘민주화의 길을 걷다’ 연재를 시작하며…

▲ 민주화의 길 안내판. 민주화의 길 지도와 조성 취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적혀 있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내에는 ‘민주화의 길’이 조성돼있다. ‘민주화의 길’은 4·19기념탑이 있는 4·19공원을 중심으로 인문대학, 자연과학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 세 갈래로 뻗어나간다. 약 1.2km의 이 길은 민주열사들의 추모비를 잇고 있다.

‘민주화의 길’은 2008년 8월, ‘6월 민주항쟁’ 21주년을 맞아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민교협)’ 소속 교수들 주도로 민주열사를 추모하고 기념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서울대 민교협은 2007년 5월,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서울대학교 민주화운동 기념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들은 2007년 6월 민주화운동 기념사업 선포식 및 설명회 개최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민주화의 길’ 조성, 민주화 운동 기록 정리 사업 등을 이어오고 있다.

 ‘민주화의 길’ 추진위원회장인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함께 달성했고, 이 과정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며 “한편 현재의 서울대는 경제성장의 자취만 반영해낼 뿐 민주화 유산은 스스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에 의하면 ‘민주화의 길’ 조성작업은 민주 열사들의 삶을 기록하고 발굴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그는 “민주주의는 선배들의 피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라며 “오늘날의 서울대 학생들 또한 이를 기억해 물려받은 민주주의를 보존해나갈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민주화의 길 안내판에는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기억을 통해서만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서울대저널>이 이번 호를 시작으로 연재하는 ‘민주화의 길을 걷다’ 코너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의 기억으로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고 최우혁 열사는 1984년 서양사학과에 입학해 분단과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1987년 4월 부모의 강요에 의해 군에 입대했다. 그는 입대한지 133일 만에 불에 탄 채 주검으로 돌아왔다. 22세의 청춘을 민주화의 제단에 바친 최 씨와 그로부터 4년 뒤 강물에 몸을 던져 아들을 따라간 어머니 강연임 씨의 넋을 기리고자 2013년 8월 31일 관악캠퍼스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추모비는 인문대 5동과 중앙도서관 사이, 박종철 열사 추모비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추모비에는 1992년 최 씨의 서양사학과 동문들이 마련했던 추모석도 함께 안치돼있다. 추모비는 홍성담 화백이 도안하고 최 씨의 서양사학과 동기인 황인욱, 안혜경 씨가 각각 추모글을 작성하고 글씨를 썼다. 마치 어머니가 알을 품고 있는 듯한 추모비 형상엔 최 씨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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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혁 열사 추모비는 홍성담 화백이 도안했고 열사의 서양사학과 84학번 동기인 황인욱·안혜경 씨가 각각 추모 글 작성과 글씨를 썼다. 1992년에 서양사학과 동문들이 마련했던 추모석을 어머니가 품는 형상이다.

우직하고 불의를 참지 않았던 대학생  

 1984년 인문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한 최 씨는 ‘경제법학연구회’에 가입해 학생운동을 펼쳤다. ‘경제법학연구회’는 소위 말하는 ‘언더 서클’ 중 하나였다. 80년대 초중반 학생운동의 우선적인 목표는 현 사회의 모순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정권의 언론통제 속에서 학생운동세력은 사회문제에 대해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통로마련을 중시했다. 그들은 교내에 대자보를 붙이고 기습시위를 진행하며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는 방법 등을 통해 사회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나갔다. 최 씨에게 ‘경제법학연구회’는 이러한 운동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토의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경제법학연구회’서 활동하며 노동투쟁, 민주화투쟁 등 각종 시위와 집회에 참석했다.

 1986년 5월 20일은 최 씨의 삶에 분기점이 됐다. 이날 오후 3시경, 농대 원예학과 4학년이었던 이동수 열사는 독재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학생회관 4층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했다. 이 씨의 죽음을 목격한 최 씨는 그 날 학내에 진입한 경찰에 맞서다 최루탄에 맞아 발가락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전치 10주의 부상에도 이 씨의 죽음은 최 씨의 학생운동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데 자극이 됐다. 최 씨는 더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하고자 노동현장으로 직접 들어갈 계획까지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잦아진 구류와 부상은 최 씨의 부모님이 최 씨에게 군 입대를 강요하는 계기가 됐다. 학생운동을 반대했던 부모님의 강요 속에 1987년 4월 최 씨는 군에 입대했다.

 육군 20사단 60여단에 소속된 그는 대학 재학 중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인해 보안부대 등에 의해 관찰대상으로 지목돼 지속적인 관찰과 공작을 받았다. 1990년 윤석양 이병에 의해 폭로된 보안사령부의 ‘서울대 운동권 동행파악 대상자 카드(387명)’에 최 씨가 포함돼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또한 2004년 2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보안부대장 A 씨와 보안부대 사병들 일부는 최 씨가 관찰대상이었다고 진술했다. 최 씨가 운동권 출신의 관찰 사병이라는 사실은 부대 내의 구타로 이어졌다. 최 씨는 부대원들로부터 얼차려, 언어폭력 등 차별 대우를 수차례 받았고, 유격훈련 중 조교의 구타로 팔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입대한지 133일째 되던 1987년 9월 8일 0시 50분경, 부대 내 쓰레기 소각장에서 최 씨는 스스로 분신했다. 헌병대 등 군 수사기관은 최 씨의 죽음을 단순한 개인적 고민에 의한 분신자살로 결론지은 채 수사를 급히 종결했다. 아들의 군 입대를 종용했던 최 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이후 충격으로 두 달 만에 뇌일혈로 한 쪽 눈을 실명했다. 이후 최 씨의 어머니는 뇌졸중, 실어증, 우울증에 시달리다 1991년 2월 19일 한강에 투신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최 씨의 죽음과 비극적인 가족사는 당대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외롭게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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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우혁 열사 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는 김치하 씨는 최우혁 열사를 ‘평소엔 소처럼 우직하지만 불의를 보면 불같이 화를 내던 친구’로 회상했다. 열사는 김 씨의 표현을 빌리면 ‘시대현실에 슬퍼하기보다는 분노하고, 이론보다는 행동으로써 실천했던 강직한 사람’이었다. Ⓒ 최우혁 열사 기념사업회

민주화 열사로 지정되기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2000년 10월 17일 출범해 2004년 6월 30일까지 민주화운동 관련 의문사 규명을 위해 한시적으로 활동한 대통령 직속기구다. 의문사위는 두 차례에 걸쳐 운영됐다. 의문사위의 출범과 이들의 활동을 규정하는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10여 년간에 걸친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유가협은 의문사진상규명 촉구 농성 의문사 진상재조사 촉구를 위한 10만 여명 서명과 국회 청원 특별법 국회 청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422일 동안의 국회 앞 천막농성 등 10여 년에 걸쳐 민주화운동 관련한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의문사위의 활동은 초기의 취지와는 달리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한영대 이철호 교수(경찰행정학과)에 따르면 의문사위는 의문사위 자체 권한과 6개월이라는 시한의 한계 관계 권력기관의 비협조 반관반민의 조직 성격 국회의 소극적 입법 작업 100여 명도 안 되는 미흡한 인력 등으로 인해 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특히 의문사위 자체 권한이 제한적이었다. 의문사위에는 조사 기관에 대한 자료 요청권만 부여됐을 뿐 압수수색권, 계좌추적권, 증언거부·담합·자료제출 거부 등에 대응할 조사 권한 등 정확한 수사를 위해 필요한 강도 높은 권한이 철저히 배제됐다.

 최 씨 또한 의문사가 규명됨에 있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차 의문사위는 최 씨의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최 씨의 유서가 없고, 보안대의 관찰이 있었음은 인정하나 최 씨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김치하 씨는 ‘최우혁 열사 기념사업회’를 이끌며 제대한 군 동료 및 관계자들과 광범위한 만남을 시도했다. 의문사특별법이 정의하는 ‘의문사’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으로서 그 사인이 밝혀지지 아니하고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죽음’이다. 김 씨는 최 씨의 군 동료들로부터 최 씨의 죽음을 ‘의문사’로 볼 수 있는 증언을 확보했지만 이들은 진술을 곧 번복했고, 결국 김 씨는 결정적 증언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김 씨와 ‘최우역 열사 기념사업회’는 포기하지 않고 유가협, ‘민주화운동정신계승연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등과 연대해 최 씨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을 지속했다. 꾸준한 노력 속에 2기 의문사위는 2004년 6월 14일, 1기 의문사위의 결론과 달리 ‘최 씨가 보안대의 관찰, 공작 및 군내의 가혹행위 등으로 최후의 항거수단인 분신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산화했으며, 향후 열사를 둘러싼 보안부대의 구체적 공작내용을 조사해 보다 명확한 진상을 규명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최 씨는 2006년 7월 31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보상 및 명예회복의 결정을 받았다. 김 씨는 “우혁이의 서양사학과 동기 선후배들, 경제법학회 동료들이 연대해 발로 뛰지 않았더라면 절대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힘들게 받은 서울대 명예졸업장  

 서울대는 2008년 2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이재호(정치학과 83학번) 씨 등 6명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으나 최 씨는 수여 대상에서 제외했다.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사망’을 공식 인정받고도 명예졸업장 수여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큰 논란이 됐다. 미등록 제적생은 명예졸업 대상자가 아니라는 학칙에 따라 명예졸업장을 수여할 수 없다는 것이 서울대 측 답변이었다. 김 씨와 기념사업회의 항의 끝에 2008년 8월 최 씨는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이에 대해 김 씨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우혁이가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적 현실이 안타깝다”며 “명예졸업장 수여는 학교의 명예로움을 스스로 부양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되는데 (이런 태도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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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혁 열사는 2008년 8월 26일, 인문대 학위수여식에서 서울대학교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열사의 부친 최봉규 씨가 아들을 대신해 졸업장을 받고 있다. Ⓒ 최우혁 열사 기념사업회

 김 씨는 오는 8월 30일, 최우혁 열사 묘를 마석 모란공원묘지로 옮길 예정이다.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마석에 위치하는 모란공원묘지는 전태일, 박종철 열사부터 2011년 작고한 김근태 씨까지 민주화의 영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김 씨는 “우혁이는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고 군에서 양주시 울대리에 급하게 묻었다”고 말했다. 김 씨를 비롯해 열사의 서양사학과 동문들, 경제법학회 동료들로 구성된 ‘최우혁 열사 기념사업회’는 열사의 묘 이전 작업을 올해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 씨는 “추모라는 말은 올해까지만 쓰고 내년부터 기념이라는 말을 쓸 생각”이라며 “벗의 넋을 위로하는 슬픔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기를 숨 쉴 수 있게 한 벗을 기억하는 자긍심으로 살아가겠다”라고 추모비 앞에서의 회상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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