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의 한 컷에 세상을 담아내다

글이 가득한 신문을 읽다보면 피로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잠깐 쉬었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눈길을 사로잡는 한 칸짜리 그림이 있다.고작 손바닥 크기의 지면을 차지하지만 신문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중요한 존재다.‘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한 칸짜리 작은 그림이 전하는 울림은 생각보다 진하다.에서 그 ‘작은 고추’를 담당하는 코너는 바로 ‘한겨레 그림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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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가득한 신문을 읽다보면 피로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잠깐 쉬었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눈길을 사로잡는 한 칸짜리 그림이 있다. 고작 손바닥 크기의 지면을 차지하지만 신문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중요한 존재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한 칸짜리 작은 그림이 전하는 울림은 생각보다 진하다. <한겨레>에서 그 ‘작은 고추’를 담당하는 코너는 바로 ‘한겨레 그림판’이다. 17년째 ‘한겨레 그림판’을 책임지고 있는 장봉군 화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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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후인 4월 22일자 ‘한겨레 그림판’. 장봉군 화백은 요 근래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국민들의 모습에서 각박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반적으로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진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한겨레

범상치 않은 이름의 정체는

  ‘장봉군’이라는 이름에서는 왠지 모르게 강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실 장봉군 화백은 ‘김주성’이라는 본명이 따로 있다. 예사롭지 않은 필명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그는 그의 필명에 대해 “특별히 시사만화랑 관련해서 의미가 있는 이름은 아니었는데 만화가로서의 첫 출발을 함께한 이름이라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고 그린 만화는 서예잡지에 실릴 만화였다. 그 영향을 받아, 붓의 끝이 획의 정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서예의 기본 필법인 ‘장봉’에 ‘놈 군(君)’ 자를 붙여 ‘장봉 군’이라고 필명을 지었다. 한겨레에 독자만화를 투고할 때도 ‘장봉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화백이 된 후로도 계속 필명을 쓰고 있다. 

사회와 그림의 연결고리, 시사만화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전공은 미술과 관계없는 영문학이었고 학교엔 만화서클 자체가 없었다. 구로지역에서 지역운동 하는 단체의 주민지에 지역문제를 소재로 만평을 그렸던 게 첫 활동이었다. 그 후 명동성당 청년회 만화서클에서 활동했고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의 교재로 쓰이던 학습만화 제작팀에서도 활동했다.

  운동권 학습만화를 그린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급변기라 할 수 있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기에 그 역시도 ‘운동’에 몸담은 적이 있다.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하기보단 주변에서 겉도는 식”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명하지만 한때는 공장으로 침투해 일한 적도 있다. 그는 그 시절 노동조합 활동을 하려고 했지만 “조직에서 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아서인지 임무를 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노조활동은 제쳐두고라도 그는 의외로 단순노동을 하면서 마음이 편했고 스스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다른 계층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운동에 계속 투신할 수는 없었다. ‘운동’ 자체가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고 대학 졸업 후의 삶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했다. 그래도 사회를 외면할 순 없었던 걸까, 그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장기를 살려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시사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겨레>에서 <문화일보>로, 다시 <한겨레>로

  시사만화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결혼을 한 후부터였다. 대학생 때부터 즐겨보던 <한겨레>에 거의 매일 독자투고를 했고 자주 선정됐다. 그런 장봉군 화백을 눈여겨봤는지 당시 <한겨레>에서 활동하던 박재동 화백으로부터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92년부터 1주일에 한 번 박 화백을 대신해 시사만화를 그렸다. 신문 지면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4년 정도 그렇게 지냈지만 1주일에 한 번만 시사만화를 그리자니 성에 차지 않았다. 다른 화백들처럼 매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때, <문화일보>의 고바우 화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화일보의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매일 시사만화를 그리고픈 욕심에 <문화일보>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문화일보>는 아무래도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잘 맞지 않았다. 내용에 대한 간섭과 개입도 많았다. 멘트가 빠지거나 조금씩 수정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창작자 입장에서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그 무렵, 그는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그는 “문화일보라는 보수매체에서 나름대로 분투하고 있으니 더 좋게 봐주고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문화일보>를 박차고 나왔다. 결정적인 이유는 부장이 던진 ‘네가 없으면 신문이 못 나갈 줄 아느냐. 지면에서 빼버리겠다’는 발언이었다. 그는 “기사 같은 경우는 글의 행간에 자신의 의도를 살짝 섞을 수도 있지만 만화는 그리는 사람의 철학이 액면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내용을 놓고 데스크와 계속 부딪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금은 인터넷 매체가 많이 생겨서 자유롭게 그리는 작가들이 많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시사만화를 다루는 매체가 일간지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진보적 성향의 젊은 작가들 다수가 <동아일보>, <문화일보>, <세계일보> 등의 보수적 매체에서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1997년 무렵 장봉군 화백은 다시 <한겨레>로 돌아왔다. 이제 그가 <한겨레>에 몸담은 지도 어언 15년이 넘었다. 

“시사만화는 100m 달리기다”

  장봉군 화백의 일과 중 대부분은 세태를 살피는 것이다. 그는 항상 뉴스와 기사를 곁에 두고 본다. 소재로 쓸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인터넷 카페나 클럽에 올라오는 글들도 본다. 한겨레신문 기자들이 쓴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일간지 기사도 읽는다. 그는 “시사만화는 100미터 달리기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100미터 달리기는 뛰는 시간이 10초 정도인데 선수는 그 시간을 위해 하루 종일 훈련하고 준비해야 한다. 시사만화도 마찬가지다. 작업시간 자체는 길지 않다. 한 컷을 그리는데 스케치부터 완성까지 길어야 2시간이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사안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 야근이 없으니 남들은 부러워하지만 그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베테랑인 장 화백에게도 마감에 대한 압박은 언제나 큰 스트레스다.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몸을 좀 움직이면 생각나기도 한다. 화장실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다. 그는 “마감시간이 닥치면 신통치 않아도 무언가 하나 떠오르긴 한다”며 프로의 면모를 드러냈다. 마감을 마친 후에도 마음은 계속 불편하고 불안하다. 제대로 그린 건지 아이디어가 신통치 않은데 괜찮은지 항상 걱정이다. 그는 “마감을 하고 나면 기진맥진하고 집에 가서도 반응을 체크해야하니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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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장봉군 화백의 모습. 2시간 남짓한 작업시간을 위해 하루 중 대부분을 세태를 살피는 데 힘쓴다. 우리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뚫어주는 한 컷의 만화는 그의 노력과 정성의 산물이다.

사실을 만화에 담아낸다는 것 

  만화에 적용할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1993년 서해 페리호 참사 당시 선장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는 그 소문을 따라가지 않았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것을 보며, 그는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만화는 한 번 보면 그 이미지가 각인되므로 사실이 틀릴 경우 기사 오보보다 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최근의 경험을 들려줬다. 얼마 전 그는 문창극 전 국무총리후보자의 식민사관을 꼬집기 위해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했다는 발언을 인용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었으며, 그 총독이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조부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그날따라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인터넷에 도는 불확실한 얘기를 쓴 것이 화근이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다음날 만화 정정을 냈다.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내용은 많지만 이처럼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만화를 읽고 그 내용을 사실이라 믿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잘못 전달한 것이어서 타격이 크다”고 설명했다.

  예전엔 장봉군 씨를 비롯해 다른 화백들도 편집회의 참석해 그날 분위기와 기사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편집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다. 다른 화백들도 요즘엔 참석하지 않는다. 신문 지면을 만드는 접근법과 만화를 그리는 접근법은 다소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편집회의에 들어가서 아이디어를 얻은 적은 5~6년 간 한번 밖에 없었다. 헷갈리는 사안에 대해 담당기자랑 얘기를 하면 그 기자는 사건의 정교한 부분까지 얘기를 해주지만 오히려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리기 힘든 경우가 있다고 한다. 장봉군 화백은 “본질이 틀리지 않는 선에서 한 발짝 떨어져 봐야하는 것 같다”며 “지나고 보면 그게 더 정확할 때도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만화를 그리다보면 과장이 섞이기 마련인데 그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문 안에 묻히다 보면 만화도 좀 건조해지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항의도 들을 필요 있는 의견

  풍자적인 만화들을 보며 속이 시원해지지만 거침없는 화백들의 안위가 걱정될 때도 있다.  장봉군 화백의 경우 근래에는 외부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고엽제 피해와 관련된 소재로 그림을 그렸을 때는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전화를 받기도 했다. 1년 쯤 전에는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전 의원을 비판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김진표 의원 측에서 그에게 직접 전화를 하진 않았지만 편집국장을 통해서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신문의 다른 기사와 함께 묶여 고소를 당한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이런 일들은 다음 만화를 그리는데 은근히 부담이 된다.

  만화에 대한 부분적인 항의 내지 부탁은 종종 있다. 압박과 항의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그는 종종 제기되는 항의에 대해선 들을 필요가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때론 표현이 지나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항의 내용이 공감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일 때 청계천 포장마차 철거문제를 소재로 그렸던 만화에 대해 ‘이명박’이라는 이름만 빼주거나 얼굴을 지워달라는 식의 부탁이 들어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 때부터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지에 흠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종교나 재벌문제도 민감한 소재라 신문에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캐릭터를 그렸을 때에는 얼굴을 축소하거나 빼달라는 등의 요구들이 있었다. 

  정치적 비판은 비교적 자유로워져서인지 오히려 ‘높은 곳’으로부터의 항의는 별로 없다. 물론 간접적으로 전달받는 얘기들은 있다. 예를 들어 ‘이명박을 너무 자주 비판하지 않냐’, ‘박근혜 대통령이 너무 자주 등장 한다’ 등의 얘기를 전달받는다. 그는 “사실 대통령에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1차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만 비판하는 것도 문제이긴 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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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친일적 발언이 연일 화제가 되던 6월 13일자 ‘한겨레 그림판’. 우리 사회 주류세력의 실체를 비판하는 풍자적 요소들이 눈에 띈다. 장봉군 화백의 기발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겨레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오늘을 그리다

  장봉군 화백의 개인적인 바람은 시사적인 만화를 탈피해 다른 종류의 만화를 그려보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가끔 등장하는 귀여운 캐릭터들이 암시하듯이 그는 특히 아동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처음부터 아동만화를 그렸어야 했는데 지금은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는 그는 아르바이트로 가끔 아동만화를 그릴 때면 적성에 맞음을 느낀다고 한다. 그에게 언제 일에 긍지를 느끼는지 묻자, 독자들로부터 반응이 좋을 때 일에 긍지를 느낀다는 답이 곧장 돌아왔다. ‘잘 표현했다’거나 ‘촌철살인’이라는 평이 있을 때는 그간의 스트레스가 말끔히 해소된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 공감하고 관심을 보이는 독자들이 있기에 그는 오늘도 열정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붓을 들어 촌철살인의 한 컷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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