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을 수 없는 벽

영화는 혼란과 함께 시작한다.가수 ‘Seal’의 노래 ‘Crazy’를 배경으로 시위 현장에서 열전을 벌이는 사람들이 화면에 잡힌다.인공임신중절수술의 합법화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1973년 미국의 모습이다.크리스천을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는 ‘낙태는 살인’임을 주장한다.페미니스트를 축으로 하는 여성단체는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역설한다.

  영화는 혼란과 함께 시작한다. 가수 ‘Seal’의 노래 ‘Crazy’를 배경으로 시위 현장에서 열전을 벌이는 사람들이 화면에 잡힌다.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합법화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1973년 미국의 모습이다.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는 ‘낙태는 살인’임을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를 축으로 하는 여성단체는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역설한다. 곧이어 흥겨운 ‘American Woman’ 음악을 배경으로, 임신 3개월 내에 한해 낙태를 합법화한다는 뉴스가 나온다. 미국 대법원 앞에서 환호하는 여성들이 필름에 담긴다. 

  낙태법을 둘러싼 논쟁은 일반적으로 생명과 선택의 대결구도를 취한다. 생명(Pro Life)과 선택(Pro Choice)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끝없는 토론이 이어진다. 하지만 인공임신중절을 다룬 영화 ‘The Wall’은 섣불리 한 쪽의 입장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낙태와 출산의 갈림길에 선 세 여성의 근심과 고통을 그려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세 사람이 받는 압박의 정도는 다르다. 개개인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도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세 여성은 그들의 고민이 보다 근본적인 것에서 비롯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생명과 선택이라는 추상적인 대결구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왜 여성이 낙태에 몰리게 됐는지 살필 것을 촉구한다. 

1952년: 클레어

  클레어는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었다. 클레어는 술에 취해 절규한다. 남편의 동생 케빈은 클레어를 위로한다는 마음에 흐느끼는 클레어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이들의 관계는 예상하지 못했던 잠자리로 이어졌고 클레어는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클레어에게 출산은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클레어의 시부모는 클레어를 통해 자신의 죽은 아들을 기억하려 한다. 시어머니는 클레어에게 “우린 한 가족이야. 뭐든 같이 극복해야지”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극진한 시부모를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케빈 또한 당시의 일에 대해 사과하며 눈물을 보였다. 클레어는 낙태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클레어에겐 그를 도와줄 사회도,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미국에서 낙태는 불법이었다. 불법 시술이 존재했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간호사인 클레어는 같은 곳에서 근무하는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의사는 “나는 당신 시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야 해요”라며 거절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클레어의 말에 그는 “당신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소”라는 말을 던질 뿐이다. 클레어는 동료 간호사 포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포드는 “나에게 더 이상 묻지 않으면 고맙겠군요”라 답한 뒤 떠난다. 클레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낙태를 위해 클레어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운다. 임산부에게 복용이 금지된 약통을 비우고 대바늘을 이용해 스스로 낙태를 시도해본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다. 절망에 빠진 클레어는 울부짖으며 남편의 누나인 베키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다. 베키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질 것을 걱정한다. 그는 “네가 알아서 해”라고 외치며 절규하는 클레어를 떠난다. ‘무엇이든 같이 극복하자’는 가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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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키가 떠나자 괴로워하는 클레어 

ⓒThe Walls

  클레어의 상황을 안쓰럽게 느낀 포드 간호사는 뒤늦게 임신중절이 가능한 경로를 알려준다. 클레어는 불법 낙태수술을 받게 된다. 수중에 돈이 많지 않았던 그는 1,000달러의 안전한 시술을 포기하고 400달러의 수술을 택했다. 수술은 클레어의 집 식탁 위에서 행해졌다. 의사는 지저분한 손으로 가방에서 도구를 꺼냈다. “소독된 것인가요?”라는 클레어의 질문에 그는 “할 거요, 말 거요?”라 반문한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클레어는 수술을 받는다. 마취제 없는 수술로 클레어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수술은 몇 분 만에 끝났다. 클레어는 “괜찮겠죠?”라고 묻는다. 의사는 그의 질문을 뒤로 한 채 말없이 떠난다. 다음 장면에서 클레어는 피를 쏟는다. 병원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그는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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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 없는 수술을 받은 뒤 클레어는 괴로워한다.

ⓒThe Walls

1974: 바바라

  22년 뒤 클레어의 집엔 바바라 가족이 살고 있다. 40대인 바바라는 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이자 네 자녀의 엄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에 짬을 내 학업에 몰두하지만, 토스트 기계의 알람은 바바라의 사색을 중단시킨다. 그에겐 학업을 위한 여유가 없다. 바바라는 네 아이와 남편의 식사와 도시락을 챙기고, 가족의 옷을 다림질해야 한다. 설거지와 청소, 아이들 싸움 말리기와 공부 봐주기까지 모두 그의 일이다. 하지만 바바라의 뱃속엔 새로운 아이가 생겼다. 바바라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그는 친구에게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림3 바바라는 친구 줄리아에게 임신을 알리며 눈물을 흘린다..JPG
▲바바라는 친구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며 눈물을 흘린다. 

ⓒThe Walls

  바바라는 첫째 딸 린다를 가진 이후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중년에 다시 시작한 학업은 바바라가 뒤늦게 찾은 그의 삶이었다. 바바라는 임신중절수술을 생각한다. 린다는 엄마에게 낙태를 적극적으로 권한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 새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의 대학 진학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린다는 “모두에게 성가신 존재인데 꼭 낳아야 해?”라고 묻는다. 하지만 남편 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바바라에게 아이를 낳자며 학업의 중단을 권유한다. 존은 자신의 조기퇴직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바바라가 “모두에게 좋은 방법을 찾고 싶다”며 낙태를 은연중에 내비치치만 존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학업에 대한 열망과 린다의 원망, 남편의 주장 사이에서 바바라는 근심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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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을 중단하라는 존의 말에 바바라는 속상함을 표현한다. 

ⓒThe Walls

  엄마로서 바바라에게 주어진 일은 버거운 짐이었다. 바바라는 근대 여류시인의 삶을 연구해 자신의 학업과 가사를 조율하는 방법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여류시인들의 가정은 불행했다. 바바라는 양육과 자신의 삶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아이들을 둘러보며 뱃속의 태아도 이 아이들과 같이 자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바바라는 딸 린다에게 자신의 결정을 밝힌다. 그리고 한 마디를 힘주어 덧붙인다. “이것은 내 의지야.”

1996: 크리스틴, 톰슨

  22년 뒤 바바라가 살던 집엔 크리스틴과 패티가 거주한다. 대학생인 크리스틴은 교제하던 교수의 아이를 임신한다. 교수는 크리스틴에게 임신중절을 위한 돈을 건네고 떠난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자란 크리스틴은 임신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낙태를 반대했다. 하지만 임신이 자신의 문제가 되자 그는 낙태를 고민하게 된다. 그의 오랜 친구인 패티는 낙태가 죄책감을 야기할 것이라며 반대한다. “하려면 해. 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라는 냉담한 말이 이어진다. 

  크리스틴은 홀로 여성의료기관을 찾아간다. 기관의 입구에 들어서자 크리스천 신자들이 그를 붙잡는다. 그들은 혼전임신을 이유로 뱃속의 아이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며 “아이를 안으면 모성애가 솟아오를 거예요”라 말한다. 그 순간 기관에서 근무하는 프랜시스가 크리스틴에게 다가온다. 그는 “아이를 때리고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낳지 않는 게 낫다”고 말하며 크리스틴을 데려간다. 크리스찬은 “크리스틴, 당신은 이미 엄마가 된 거예요”라 소리친다. 크리스틴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의사와 상담하는 중 크리스틴은 아이를 출산할 경우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지원에 대해 묻는다. 의사는 아기용품 정도일 것이라 답한다. 죄책감과 복잡한 심경으로 낙태를 결정하지 못한 크리스틴은 집으로 돌아온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털어놓으려 하지만 입을 열지 못한다. 크리스틴은 술에 취해 패티에게 울부짖는다. “내가 매우 끔찍한 실수를 한 거야. 나의 진정한 친구라면 날 좀 용서해줄 수 없어?” 패티는 크리스틴의 울음에서 그의 괴로움을 느낀다. 그는 크리스틴의 수술에 동행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림5 낙태를 결정하기 전 크리스틴은 의사와 대화를 나눈다. 크리스틴은 정말 불공평한 건 그는 돌아가고 나만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거예요. 아기를 죽인다는 죄책감까지 느끼면서요라 털어놓는다..JPG

▲낙태를 결정하기 전 크리스틴은 의사와 대화를 나눈다. 크리스틴은 “정말 불공평한 건 그는 돌아가고 나만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거예요. 아기를 죽이는 죄책감까지 느끼면서요”라 털어놓는다. ⓒThe Walls

  다음날 여성의료기관 앞은 낙태 반대와 찬성 시위로 북적인다. 반대 시위대는 크리스틴과 기관의 대표의사인 톰슨을 가로막는다. 가까스로 병원에 들어온 톰슨은 방탄복을 벗고 감정을 추스른다. 그는 수술대에 오른 크리스틴의 수술을 시작한다. 크리스틴은 톰슨에게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 직장을 택한 이유를 묻는다. 톰슨은 웃으며 “날 찾아와 울며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들을 생각하면 난 내 일이 부끄럽지 않아요”라 답한다. 크리스틴의 수술이 끝나는 순간 한 남성이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는 “살인자”라 외치며 톰슨에게 여러 차례 총을 쏜다. 톰슨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쓰러진 그를 껴안고 크리스틴은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주변은 고요하기만 하다.

그림6 총에 맞아 사망한 톰슨과 그를 껴안은 크리스틴. 주변 사람에게 도와달라 소리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JPG
▲총에 맞아 사망한 톰슨과 그를 껴안고 있는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도와달라고 소리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The Walls

벽 밖에선 들리지 않는 여성들의 목소리 

  약 20년의 격차를 둔 세 여성의 이야기는 같은 집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집은 낙태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를 보이는 듯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영화에 담기는 집의 모습이 달라진다. 1952년 클레어의 집은 어둡고 폐쇄적이다. 클레어의 시부모는 이혼한 여성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바라본다. 아무도 낙태를 하려는 여성을 도와주지 않는다. 클레어는 자신의 고뇌를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클레어는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린다. 1974년 영화가 보이는 집의 모습은 한층 개방적이다. 카메라는 집의 정원과 집 밖의 걸어가는 사람도 담는다.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낙태도 합법화됐다. 바바라의 딸 린다는 거리낌없이 엄마에게 낙태를 권한다. 1996년 카메라는 크리스틴의 집을 벗어나 도로를 바라본다. 영화엔 낙태를 돕는 여성의료기관이 등장하며 낙태의 합법화를 외치는 시위의 장면도 담는다. 크리스틴은 의사 톰슨을 보며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집은 점차 개방적으로 변한다. 사회도 이전만큼 낙태에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여성은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클레어와 바바라, 그리고 크리스틴의 낙태에 대한 고민과 그들의 목소리는 집을 넘어서지 못한다. 벽을 넘고자 했던 의사 톰슨은 낙태 반대주의자에게 살해당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고립시키고 가둔 그 벽은 이들을 낙태와 출산의 갈림길에 몰아넣은 사회를 가리킨다. 클레어의 시부모가 클레어를 붙잡아두지 않았다면 클레어는 출산을 고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에 여성에게 요구되는 정절과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클레어는 고립됐다. 넓은 집에서 혼자 거주하던 그는 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다 죽었다. 바바라 또한 그에게 지워진 끝없는 양육과 가사가 덜했다면, 새로운 임신이 그의 학업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면 그토록 오랜 기간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역할 배분과 차등적인 지위에서 바바라는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라는 지위,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과 임무를 위해 바바라는 그의 꿈을 다시 유예해야만 했다. 크리스틴은 낙태에 대한 사회의 인식으로 괴로워했다. 주변 사람들은 크리스틴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모성을 가질 것이라 확신하고 아이를 낳으라고 말한다. 그들은 낙태를 할 경우 죽은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질 것이라고 확언한다. 임신은 다자가 얽힌 복합적인 행동의 결과임에도 임신의 책임과 낙태에 대한 비난은 여성에게만 돌아간다. 사회적 지원이 있다면 아이를 낳았을 크리스틴은 죄책감을 가지고 수술대에 올랐다.

  현재 한국사회는 클레어와 바바라의 사이에 놓인 듯하다. 우리나라의 현행법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임신중절수술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 법조항은 사문화된 상태다. 매년 35만 건의 낙태시술이 행해지지만 처벌을 받는 경우는 연평균 10건 미만이다. 법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생명과 선택의 논쟁이 열린다. 태아를 독립된 생명으로 보는 ‘Pro Life’ 단체는 낙태를 엄격하게 금지할 것을 외치고 있으며 여성의 선택을 중시하는 ‘Pro Choice’는 합법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 주장을 살피기에 앞서 우리는 현실 속 인물들을 살펴야 한다. 영화와 같이 이들의 상황은 생명과 선택의 논쟁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생명과 선택의 대립을 넘어 출산 혹은 낙태가 선택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은 무엇인지, 왜 이 여성들은 말을 할 수 없는지, 누가 이 여성들의 손을 잡아끌었는지 숙고하는 일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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