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싸우고 있다, 이제 싸움을 끝내야 한다”

▲ 코오롱 정투위는 2014년 현재 투쟁 10년째를 맞고있다.9월 30일 기준으로 정리해고분쇄투쟁 3509일째, 과천 천막 농성은 873일째다.2012년 5월 11일, 과천정부청사역 4번 출구 코오롱 본사 앞에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정투위)의 천막이 들어섰다.이곳에 코오롱 정투위의 천막이 들어선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하지만 코오롱 정투위는 2012년 5월 농성에서 ‘끝장투쟁’을 선포했다.이 선포는 한편으로 절실함의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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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오롱 정투위는 2014년 현재 투쟁 10년째를 맞고있다. 9월 

30일 기준으로 정리해고분쇄투쟁 3509일째, 과천 천막 농성은 873일째다.

 2012년 5월 11일, 과천정부청사역 4번 출구 코오롱 본사 앞에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정투위)의 천막이 들어섰다. 이곳에 코오롱 정투위의 천막이 들어선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코오롱 정투위는 2012년 5월 농성에서 ‘끝장투쟁’을 선포했다. 이 선포는 한편으로 절실함의 표출이었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정투위 ‘동지’는 50명에서 15명으로 줄었고, 그 중에서도 천막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두 명뿐이었다. 정투위가 만들어지고 투쟁이 격렬했던 처음 2년간은 언론 보도가 잦았지만, 그 이후 언론의 관심은 시들해지고 코오롱 정리해고 사태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장기투쟁 중에서도 가장 긴 편에 속하는 코오롱 정투위는 더 이상 투쟁이 길어지는 일을 막고자 구미에서 과천으로 먼 길을 와 코오롱 본사 앞에 자리를 폈다.

 코오롱 정투위가 과천에 천막을 친 지도 2년이 훌쩍 지난 지금, ‘끝장투쟁’을 선포한 지도 약 900일이 지났다. ‘끝장투쟁’마저 장기화되고 있는 셈이다. 올해 투쟁 10년째를 맞이하는 정투위는 현상의 고착화를 막기 위해 진짜 마지막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노동자 발등 찍은 코오롱, 죽는 것 빼고 다 해봤지만…

 2004년 6월부터 8월까지 코오롱 구미공장에서는 총 64일간 노조의 총파업이 진행됐다. 코오롱 정리해고 사태의 서막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코오롱 측에서 경영 위기를 이유로 인원 구조조정을 공장 노동자들에게 통보했고, 이에 1400명의 노동자가 ‘고용보장’과 ‘신규투자’를 외치며 파업에 동참했다. 노동조합은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를 얻어내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 한계사업(경제여건변화로 경쟁력을 잃어 성장과 채산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사업) 철수 인정은 물론 실질임금의 20% 삭감에 합의하며 실질적으로 크게 손해를 봤다. 이미 노조 파업을 겪은 코오롱 측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 일어난 일이었다. 파업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노조와 노동자의 자신감을 갉아먹었다.

 노동자들이 지푸라기처럼 붙잡은 그 ‘고용보장’도 결국 소용없었다. 코오롱 측에서는 합의안과 달리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2004년 11월부터 공장내부에서는 구조조정 이야기가 떠돌았다. 12월이 되자 코오롱 측은 사원을 대상으로 ‘조기퇴직 우대제’를 실시했다. 파업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노동자들은 조기퇴직을 선택했다. 퇴직금이라도 제대로 받고 비정규직으로나마 다시 공장에 들어오기 위해서였다. 그 수가 구미만 431명, 경산·구미·김천 총 878명에 달했다. 코오롱은 900명에 달하는 사원이 조기퇴직을 신청했는데도 304명을 더 정리해고 하겠다며 노동부에 고용조정계획서를 제출했다. 노조는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사측에 임금의 15%를 또 삭감하겠다고 했다. 사측과 노측은 ‘경영위기극복을 위한 구미공장·김천공장 인원조정 관련 합의서’를 작성했다. 이 합의서에는 이미 퇴직한 431명을 포함해 509명의 인원조정 내용이 포함됐다. 코오롱 측은 본래 인원조정 목표인 509명을 채우되 정리해고가 아닌 희망퇴직의 방식을 취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노조위원장이 이에 동의하고 합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여 일 후, 구미공장에서 78명, 김천공장에서 4명의 노동자가 정리해고 통보서가 담긴 노란 봉투를 받았다. 구미공장에서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78명 중 68명은 전·현직 노동조합 간부였다. 해고 통보 과정에서 사측은 정리해고 대상자를 면담했는데, 이때 언급한 해고 사유 중에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노래방 도우미와 못 놀아서’ 등의 기막힌 이유도 포함됐다. 

 82명의 사원에 대한 해고는 2005년 2월 21일에 실시됐다. 해고 후 이틀이 지난 2월 23일, 해고 노동자 중 50명이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 2년 동안 정투위의 투쟁은 매우 격렬하게 진행됐다. 최일배 현 정투위 위원장은 “죽는 것 빼고는 다 해 봤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최 씨는 당시 해고자 신분으로 2005년 7월에 있는 노동조합 선거에 출마했다. 코오롱 측이 선전 활동을 방해했지만 최 씨는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하지만 사측은 최 씨를 위원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교섭을 거부했다. 코오롱 측은 오히려 공장 안에 용역 100여 명을 배치하는 등 노동조합 탄압을 노골화했다. 최 씨는 위원장실에 ‘忍(참을 인)’자까지 새겨두고 대화를 요청했지만 길이 없었다.

 정투위로서는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바뀐 2006년 최 씨는 단식투쟁을 했고, 최 씨의 단식이 17일째 되는 날 다른 3명의 조합원은 구미공장 내 송전탑에 올랐다. 노조의 단식, 노숙, 삭발, 삼보일배, 송전탑농성 중 어느 것도 코오롱 측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조합원 3명이 송전탑 위에서 목숨을 걸고 농성을 시작한 지 9일째 되는 3월 14일, 노조는 과천 코오롱 본사 로비를 점거하고 이웅렬 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여기서도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최 씨를 포함한 조합원 10여 명은 이웅렬 회장 집의 담을 넘었다. 이웅렬 회장의 집에서도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찰이 검거를 하려하자 최 씨는 대치 끝에 커터 칼로 손목의 동맥을 끊었다. 그는 경찰에 의해 병원에 실려가 상처를 꿰매는 조치를 받은 후 구속됐다.

코오롱 정투위의 2라운드, ‘시민과 함께’

 2006년 4월 중앙노동위원회에 의해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구제 재심신청’이 기각되면서 정투위 위원들은 조합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같은 해 7월, 노조위원장은 최일배 씨에서 김홍열 씨로 교체됐고, 그해 12월 코오롱 노조는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2년간의 치열한 투쟁 끝에 정투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내부적으로 ‘해볼 건 다 해봤다’, ‘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끝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전체회의 후에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투위 최일배 위원장에 따르면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처음 했던 것부터 다시 시작하더라도 해보자’고 마지막 결론이 났다”고 한다.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정투위는 ‘생계팀’과 ‘투쟁팀’으로 나눠졌다. ‘생계팀’에 속한 위원들은 대리운전 등 다른 일을 해서 달마다 20만 원씩을 투쟁기금으로 냈다.   

 2007년부터 2012년 5월 과천에 천막을 다시 치기 전까지, 코오롱 정투위는 해고 노동자 대부분의 삶의 터전인 경북 구미에서 출·퇴근 선전전, 중식 선전전을 진행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오전 5시에 일어나 과천 본사 출근 선전전과 중식선전전을 진행했다. 오후에는 서울 지역 다른 투쟁 사업장을 찾아 연대 투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구미와 과천을 오가며 5년을 꾸준히 투쟁했지만 성과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최 씨는 “서울 투쟁 사업장에 연대하러 가면 그곳 사람들조차 우리의 투쟁에 대해서 잘 몰랐다”며 “같이 연대하는 사람들조차 모르는데 코오롱에 우리의 소리가 들렸겠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 사이 투쟁팀의 수는 3명으로 줄었다. 그중 1명은 민주노총에 파견 가 있어서 실질적으로 투쟁이 가능한 것은 2명뿐이었다. 2명으로 할 수 있는 투쟁은 본사 앞 천막농성 밖에 없다는 판단에 2012년 5월 11일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 천막을 쳤다.

 정투위의 투쟁 ‘2라운드’는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보다 시민친화적인 방식이었다. 2005년과 2006년의 정투위 천막은 코오롱 그룹의 대외적 이미지에 타격을 주자는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흉측하게 지어졌다. 2012년의 천막은 시민과 함께하고자 깔끔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근처 현수막에 달린 문구도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길게 또 덜 과격한 어투로 쓰였다. 과천시민들도 정투위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천막이 세워지자 시민들이 모여 뜨개질로 ‘정리해고 나빠요’라는 문구를 넣은 현수막을 만들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집밥’을 먹자며 천막에 각각 반찬가지를 가지고 모여 점심을 먹는 모임이 일 년간 정기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 반찬가게에서는 월요일과 금요일에 저녁반찬을 무상으로 배달해주기로 했고, 이 도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코오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아예 과천시민들을 중심으로 공동연대를 하고자 만든 모임이다. 지역의 연대 가능한 단위들이 모여서 공대위를 구성했다. 공대위에 속한 단체들은 코오롱 본사 앞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있는 문화제를 돌아가며 개최한다. 코오롱 공대위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갖는다. 이 회의에서 코오롱 스포츠 불매운동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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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0월 '찐 계란으로 코오롱 치기'라는 구호와 함께 코오롱 

불매운동 시즌2가 시작됐다. ⓒ 화섬뉴스

코오롱 스포츠 불매, 코오롱 정투위는 10년 만에 투쟁의 막을 내릴 수 있을까

 코오롱 스포츠 불매운동은 2013년 4월부터 시작됐다. 코오롱 본사 앞에 천막을 친 지도 1년이 지나도록 코오롱은 침묵을 유지했다. 정투위와 공대위는 천막농성만으로 코오롱 그룹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자본의 수익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불매운동’을 투쟁 방식으로 택했다. 2005년경에 이미 민주노총 측에서 불매운동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코오롱은 계열사가 많아 계열사 전체에 대한 일괄적 불매가 어려웠다. 결국 불매운동은 흐지부지 끝났다. 이때의 실패를 거름삼아 계열사 중 가장 잘 알려진 코오롱 스포츠에 초점을 맞춘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정투위와 공대위는 코오롱 스포츠의 실질적 구매자인 등산객들에게 불매운동을 알리기 위해 산으로 갔다. 이들은 불매운동을 더 광범위하게 알리기 위해 직접 꽃분홍색 몸 벽보를 입고 산을 누볐다. 일반 시민과 달리 확실히 등산객들은 불매운동에 관심을 갖고 몸 벽보를 입은 사람에게 불매의 이유를 묻기도 했다.

 코오롱 정투위와 공대위는 탄력을 받아서 ‘불매운동 시즌2’를 준비했다. 시즌2에서는 이전에 등산하는 데 번거롭고 쓰레기가 된다는 지적을 받은 유인물을 버리고 대신 불매계란을 준비했다. 불매계란에 코오롱불매 스티커를 붙여서 등산로 입구에서 나눠줬다. 불매계란에 대해서는 시즌1보다 더욱 반응이 뜨거웠다. 목표인 10만 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4만 5천 개의 계란을 시민에게 나눠줬다. 일부 계란은 근교 학교에 ‘정리해고 나빠요’라는 도장을 찍어서 나눠주기도 했다. 코오롱 정투위 최일배 위원장은 “우리 때는 정리해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아이들 대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코오롱 측에서는 유례없이 강한 반응을 보였다. 코오롱 측은 전국 102곳 산에서 불매운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가처분 신청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내용이었지만 코오롱이 정투위의 투쟁에 반응을 보였다는 면에서 희망적이기도 했다.

 2014년 불매운동은 QR코드를 활용한 버튼을 나눠주는 방식이었지만 2, 3차례 정도 이뤄지고 이후 세월호 사태와 겹쳐 중단됐다. 이때 민주노총 소속 기아자동차 지부에서 코오롱스포츠 체육복을 수십억 원어치 단체 구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불가피하게 중단된 불매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불매운동 중에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코오롱스포츠 제품을 구매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투쟁 인원이 부족해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의 협력이 절실했던 정투위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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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오롱 정투위 최일배 위원장은 10년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절박함’이라고 답했다.

 코오롱 정투위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람이다. 2012년 과천에 천막농성장을 세웠을 때 15명이었던 위원 수는 2013년 14명으로 줄었다가, 두 달 전에 두 명이 더 떠나면서 12명으로 줄어들었다. 2012년 농성장을 세운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문화제에는 50여 명의 사람이 참여했지만 이제 평균적으로 10여 명 남짓이다. 농성장에 머무는 코오롱 정투위 최일배 위원장도 이런 상황의 고착화를 가장 염려한다고 말했다. 그는 “‘잘 버티고 있다’는 곧 ‘잘 살고 있다’는 말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코오롱 정투위와 코오롱 공대위는 ‘10년’을 넘기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올해 말의 집중 투쟁을 염두에 둔 말이다. 코오롱 정투위 최일배 위원장에게 ‘10년’의 의미를 물었더니 “10년은 꽉 찬 느낌이다, 그만큼 절박하다”고 답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코오롱 정투위의 목표는 ‘원직복직’, ‘정리해고 부당성 알리기’로 한결같다. 그리고 최 씨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했다. ‘사람을 남기는 투쟁’이다.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으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 더 분명한 것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운다’ 이런 것은 원하지 않아요. 다수의 사람이 있을 때 그때 같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언젠가 그런(끝나는) 시점이 오리라고 봅니다. 결과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싸워 왔는지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같이 싸워 온 소중한 동지들이 다른 데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싸운 이 싸움을 후회하지 않는 마무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남기는 투쟁’으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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